인간이 직면한 모든 문제, 자연에게 물어보라
입력 2013-08-22 17:19
새로운 황금시대 / 제이 하먼 / 어크로스
‘찍찍이’라고 불리는 벨크로는 옷이나 가방에 지퍼 대신 달아 여미는 장치다. 1941년 스위스 발명가 조르주 드 메스트랄이 만들었지만 그 핵심 기술의 보유자는 ‘도꼬마리’라는 풀이었다. 드 메스트랄은 알프스 등반 도중 도꼬마리가 성가시게 양말과 개털에 달라붙자 이를 가져와 현미경으로 관찰했고, 여기에서 벨크로의 핵심인 걸이와 고리 구조를 발견했다. 이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생체모방(Biomimicry)’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생체영감(Bio-inspiration)’으로 대체되기도 하는 생체모방이란 개념은 자연으로부터 배운 것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용하는 것을 뜻한다. 1997년 동물학자였던 재닌 M. 베니어스가 동명의 책 ‘생체모방’에서 자연의 설계 원리 등을 모방해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찾자고 주장하면서 도입된 개념이다. 베니어스의 책은 저자인 제이 하먼 역시 수차례 읽어볼 것을 권하는 이 분야 최고의 명저다(국내엔 2010년 출판사 ‘시스테마’가 번역해 소개했다). 자연을 단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문제 해결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체계적인 디자인으로 소화하는 적극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생체모방 기술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벌, 나비, 나뭇잎, 도마뱀, 상어, 고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로부터 이들의 기술과 디자인을 배워왔다.
무선통신기술 분야의 세계적인 기업 퀄컴은 나비 날개 구조에서 영감을 얻어 전자 스크린 개발에 나섰다. 나비 날개는 실제 색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프리즘과 비슷한 표면의 결정구조 덕분에 다채로운 색상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퀄컴은 이에 착안해 7년간 10억원 이상을 쏟아 부어 새로운 전자 스크린을 개발했다. 이 스크린은 전통 스크린에 비해 전력 사용량을 90%나 줄일 수 있다.
독일 과학자들은 상어 피부의 돌기를 보고 새로운 페인트를 개발했다. 상어 피부는 ‘방패비늘’이라 불리는 작은 세로 비늘로 덮여 있는데 물이 달라붙어 앞으로 가는 움직임을 방해하지 못하게 한다. 이들은 미세한 나노입자를 배합한 페인트를 항공기 외관에 활용했고, 획기적인 기술로 각광받았다.
이 뿐만 아니다. 미군은 살모사의 열기 감지 능력을 활용해 전투기의 적외선 감지 기술 정확도를 높이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 거미줄의 탄성과 연꽃의 방수 성질을 이용한 신소재 연구도 한창 진행 중이다.
기술 외에 디자인에도 적극 활용됐다. 일본의 신칸센은 물총새를 모방해 만들었다. 스페인의 세계적인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는 미국 시카고 스파이어 건물을 디자인하면서 일각고래의 엄니 등의 곡선 형태를 가져와 바람의 저항을 감소시켰다. 금융 위기로 공사가 중단됐지만 조감도 공개만으로도 상당히 주목받았다.
저자 제이 하먼은 호주 출생으로, 30년간 자연을 실험실 삼아 직접 다양한 생체모방 기술 개발에 앞장서온 연구자다. 기술 개발뿐만 아니라 이를 토대로 다양한 특허와 라이선스를 획득해 산업화에 힘써온 사업가이기도 하다. 벤처 기업 ‘팍스 사이언티픽’과 자회사 ‘팍스 워터 테크놀로지’를 통해 혁신적인 자연 모방 디자인의 상품들을 내놨다.
저자는 기술력과 산업 생태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 삼아 생체모방 기술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그리고 19세기 미국에서 금광을 찾아 몰려갔던 ‘골드 러시’가 21세기엔 생체모방 기술을 통해 재연될 것이라며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언급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2025년 생체모방 시장이 미국 3000억 달러, 세계적으로 1조 달러 규모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저자가 생체모방 기술에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히 돈 때문만이 아니다. 화석 연료 고갈과 에너지 낭비, 계속된 자연 파괴와 환경오염으로 지속가능한 개발의 한계에 이른 인간이 해법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자연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살기 시작한 38억년 전부터 자연은 생존을 위해 투쟁해왔다. 현존하는 200만종의 생물체는 저마다 생명 유지와 결부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백 가지 해법을 찾았다. 핵심은 자연은 인간의 방식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는 점이다. 자연은 가까운 곳에서 에너지를 찾았고, 그 에너지와 자원 낭비를 최소화했으며, 자신이 만든 것을 재활용해왔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이 책은 인간이 직면한 기술, 생물, 디자인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원천이 자연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천 억, 수조 개에 달하는 자연의 해법은 새로운 세계 건설의 원대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 우리의 병든 환경과 대기를 구하고 강력하고 새로운 지속가능한 경제를 낳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복잡한 기술에 대한 명쾌한 설명과 풍부한 예시를 통해 21세기 인류가 추구해야 할 과학 기술과 산업의 길을 선명하게 제시하는 책이다. 이영래 옮김.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