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노석철] 청문회 주역 김용판의 경우
입력 2013-08-21 18:08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 국정조사 청문회는 한 편의 막장드라마였다. ‘이런 빌어먹을 X’ 하면서도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3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했다. 막말과 고성, 삿대질은 청문회에서 늘 보던 거라 그저 그랬다. 개그콘서트 ‘시청률의 제왕’처럼 스토리가 식상해질 때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은 결정적인 한 방을 터트렸다. 여권에 불리한 증언을 계속하는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에게 “광주의 경찰이냐. 대한민국의 경찰이냐”고 몰아붙이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주연은 단연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었다. 국회 사상 처음으로 증인 선서를 거부한 뒤 야당 의원들의 질의에 시종 당당하고, 때론 빈정거리듯 답하는 그의 모습에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는 그동안 불거졌던 의혹과 검찰 공소사실까지 깡그리 무시하면서 야당 국회의원들이 주눅이 들 만큼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여권에 존재감 각인시키다
그를 보면서 지난해 12월 16일 밤 상황이 오버랩됐다. 그날 박근혜·문재인 후보의 3차 TV토론 후 ‘박 후보가 밀린 것 같네?’라는 평가가 나오는 상황에서 갑자기 ‘댓글사건’ 수사결과 발표 문자에 이어 ‘국정원 직원의 비방 댓글은 없었다’는 취지의 보도자료가 밤 11시쯤에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도대체 누가 지시한 거야’라는 고성이 터져나왔다. 대선을 3일 앞두고 벌어진 일이다. 당연히 선거개입 의혹이 일었고, 경찰 내부에서는 ‘경찰의 수치’ ‘정치 경찰’이란 자조가 쏟아졌다. 당시 비난을 뒤집어썼던 그가 ‘뭘 잘못했느냐’는 식으로 당당하게 청문회를 치렀다. 왜 그럴까.
그의 행적을 돌아보자. 그는 지난해 5월 서울경찰청장에 취임했다. 그는 당초 주목받지 못했던 경찰청 보안국장에서 수직이동했다. 이를 두고 ‘친박 핵심 천거설’ 등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이후 댓글사건 수사개입 의혹에 발목 잡혀 현 정부 첫 경찰인사에서 옷을 벗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와 서울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를 두고 출마선언이자 여권에 공천을 달라는 무언의 메시지라는 해석이 나왔다. 정치권에서도 그가 TK(대구·경북) 지역 국회의원 등을 노린다는 관측이 공공연히 떠돌았다.
법정에서도 당당할 수 있을까
따라서 ‘전직 경찰 김용판’이 아니라 ‘정치인 김용판’으로 본다면 그의 청문회 전략은 감탄할 정도로 포지셔닝이 명료했다. 인지도를 높이고 여권에 존재감을 확실히 인식시키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그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적극적인 지원사격 아래 최전방 공격수로 야권의 공세를 온몸으로 막아줬다. 증인으로 출석한 다른 경찰관들도 일사불란하게 그와 호흡을 맞췄다. 야당은 청문회에서 별로 얻은 게 없었고,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다. 특검 공세 등 후폭풍은 계속 이어지겠지만 여권은 김 전 청장 덕분에 청문회라는 급한 불은 껐다. 여권은 그에게 또 한번 큰 빚을 지게 됐다. 특히 새누리당 핵심 지지층에서는 속 시원하게 대답 잘했다는 칭찬까지 듣게 됐으니 그로서는 일거양득이 아닐까.
물론 그의 당당함에 민심이 들끓게 된 것은 여권에 큰 부담이다. 그의 친정인 경찰 조직의 신뢰가 크게 훼손된 것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다. 그러나 여권으로선 무시하는 전략 외에는 달리 방법도 없어 보이고, 민심 악화는 두고두고 감내해야 할 부분이다.
김 전 청장은 댓글 수사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코앞에 두고 있다. 청문회가 여론과 싸우는 무대라면, 재판은 실체적 진실과 죄의 유무를 밝히는 과정이다. 청문회에서 그는 적잖은 실리를 챙겼지만 법정에서는 과도한 당당함이 본인에게 치명적인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그가 판사들 앞에서도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노석철 사회부장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