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배추고도’ 초록이 영그네∼

입력 2013-08-21 17:08 수정 2013-08-21 17:14


강원도 고랭지 배추밭으로 떠나는 늦여름 피서 여행

고랭지 배추밭이 풍경화로 거듭나는 계절이다. 강원도 평창의 육백마지기를 비롯해 강릉의 안반덕, 태백의 귀네미마을과 매봉산고랭지채소단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4대 고랭지 배추밭. 한여름 뙤약볕을 먹고 자란 배추가 수확을 앞두고 촘촘한 등고선을 그리는 배추밭은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출사지이자 도보여행자들의 트레일로도 인기가 높다. 화전민과 수몰민의 눈물과 땀으로 탄생한 강원도 고랭지 배추밭으로 출사를 겸한 늦여름 피서를 떠나본다.

◇육백마지기(평창)=우리나라 최초의 고랭지 채소밭으로 유명한 육백마지기는 청옥산(1256m) 정상 아래의 드넓은 평원에 위치한다. 평창군 미탄면과 정선군 정선읍에 걸쳐 있는 청옥산은 곤드레나물과 함께 청옥(靑玉)이라는 산나물이 자생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육백마지기는 평지가 드문 강원도 산골에서 볍씨 육백 말(斗)을 뿌릴 수 있는 넓은 평원이라고 해서 명명됐다.

1960년대에 개간된 육백마지기는 가는 길부터 험하다. 미탄면사무소에서 아스팔트로 포장된 시골길을 달려 회동리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구절양장 가파른 산을 오른다. 고산준령이 발아래로 보일 때쯤 아스팔트길은 끝나고 거친 돌로 이루어진 비포장길이 시작된다. 육백마지기의 매력은 숲길이 끝나는 순간 고랭지배추밭이 눈앞에서 파노라마로 펼쳐진다는 점.

일년에 두 번 농사를 짓는 육백마지기는 배추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아직은 볼품이 없다. 오랜 장마로 흙이 쓸려나가 다시 배추를 심었기 때문이다. 배추밭 사이로 드문드문 무밭도 조성된 육백마지기는 돌밭으로 유명하다. 푸석푸석해 잘 깨지면서도 납작하게 생긴 돌은 빗물에 흙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방지한다고.

육백마지기는 야생화 천국으로도 유명하다. 상추와 꽃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단지를 지나 청옥산 정상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형형색색의 야생화가 배추밭만큼 드넓게 펼쳐진다. 이른 아침에 산을 오르면 메밀꽃처럼 하얀 운무로 뒤덮인 육백마지기에서 가녀린 야생화가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풍경도 만날 수 있다.

◇안반덕(강릉)=해발 1100m 높이의 백두대간에 위치한 안반덕은 우리나라에서 주민이 거주하는 가장 높은 마을로 20여 가구가 배추농사를 짓고 있다. 피득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옥녀봉(1146m)과 북쪽의 고루포기산(1238m)에 198만㎡의 고랭지 배추밭이 독수리 날개처럼 펼쳐지는 안반덕은 우리나라 최대의 고랭지 배추밭으로 유명하다.

안반덕의 행정명은 강릉시 왕산면 대기4리. 강릉 사투리로 안반데기로도 불리는 안반덕은 지형이 떡메로 떡살을 내려칠 때 쓰는 안반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 1965년 화전민에게 국유지 개간을 허용해 임대해오다 1986년 경작자들에게 매각했다. 처음에는 감자나 옥수수 등을 심었으나 고랭지 배추가 인기를 끌면서 마을 전체가 배추밭으로 변신했다.

안반덕 배추는 단단하고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경사가 워낙 가팔라 배추농사 짓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쟁기질을 위해 포클레인과 소가 동원된다. 안개와 이슬을 먹고 자란 배추가 가파른 등고선을 그리는 안반덕은 배추 속이 차기 시작하는 8월 말부터 수확을 하는 추석 전후까지 가장 아름답다.

안반덕 일대를 한눈에 조망하려면 풍력발전기 2기가 위치한 옥녀봉 정상이나 맞은편의 멍에전망대에 올라야 한다. 배추밭 사이로 난 가파른 농로를 오르면 하늘 아래 첫 동네답게 푸른 하늘과 맞닿은 배추밭이 포물선을 그린다. 화전민들의 삶과 애환을 엿볼 수 있는 화전생활체험촌도 조성돼 있다.

◇귀네미마을(태백)=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형세가 소의 귀를 닮아 명명된 귀네미마을은 본래 원시림으로 울창한 산이었다. 1985년 삼척시 하장면에 광동댐이 생기면서 광동리를 비롯해 숙암리와 조탄리 등에 흩어져 살던 주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축구장 150개 크기의 배추밭을 조성했다.

귀네미 마을은 35번 국도에서 십리쯤 떨어져 있다. 구불구불한 시멘트 포장길을 오르면 병풍처럼 둘러싼 산자락 사이로 30여 채의 한옥이 몇 가구씩 옹기종기 모여 정담을 나누고 있다. 현기증이 일 정도인 급경사의 비탈에는 출하를 앞두고 나날이 몸무게를 불리는 배추가 촘촘한 등고선을 그리며 백두대간 능선을 오르고 있다.

해발 900∼1100m에 위치한 귀네미마을은 해양성 기류가 교차하는 지점이라 일교차가 크다. 한여름에도 긴팔 옷을 입어야 할 만큼 서늘해 이곳에서 생산된 고랭지 배추는 수분이 적고 당도가 높아 씹는 맛이 아삭아삭하다.

최근 풍력발전기 9기가 들어선 귀네미마을의 정상은 태백시와 삼척시 경계에 솟은 삿갓봉(1185m)으로 해돋이 명소. 정상에 서면 덕항산 매봉산 푯대봉 가덕산 등 중중첩첩 이어지는 백두대간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침햇살에 황금색으로 물드는 배추는 금추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황홀하다.

◇매봉산고랭지채소단지(태백)=천의봉으로도 불리는 매봉산(1303m)은 산의 중심이자 물의 중심이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중심에 위치한데다 매봉산 아래 삼수령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북쪽으로 흐르면 한강,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 그리고 동쪽으로 흐르면 오십천에 합류하기 때문이다.

삼수령에서 구불구불한 산길을 3.8㎞ 정도 오르면 10여기의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매봉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산비탈에는 이미 수확이 끝난 빈 배추밭과 속이 여물기 시작한 배추밭이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린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화전민들을 이주시켜 개간한 매봉산 고랭지 배추밭의 규모는 110만㎡. 트럭 한 대 지나갈 정도로 좁은 농로는 가파른 등고선을 그리며 정상을 올라 ‘배추고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여느 고랭지 배추밭과 달리 매봉산 배추밭은 전망이 뛰어나다. 태백산 함백산 금대봉 은대봉 덕항산 등 한반도의 등줄기를 이룬 백두대간과 골짜기에 둥지를 튼 마을은 한 폭의 산수화. 배추밭은 보는 위치와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서쪽 하늘을 붉게 채색하는 해질녘 배추밭과 별빛이 쏟아지는 한밤의 배추밭은 매봉산에서나 만나는 진귀한 풍경.

바람이 거세 ‘바람의 언덕’으로 명명된 매봉산 능선은 트레킹 코스로도 유명하다.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의 산행객들이 배추밭 사잇길을 걷는 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 태백시는 이달 25일까지 삼수령 입구에서 매봉산 전망대까지 무료셔틀버스를 운행한다.

평창·강릉·태백=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