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건 귀신이 아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현실적인 두려움이지요.”
순제작비 25억원으로 개봉 4일 만에 최단 기간 손익분기점(관객 140만명)을 돌파하며 알짜 흥행중인 ‘숨바꼭질’의 허정(32) 감독. 상업영화 데뷔작인 이 작품으로 지난 주 ‘설국열차’ ‘감기’ ‘더 테러 라이브’ 등 쟁쟁한 작품을 따돌리고 20일 현재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26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그를 20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충격적인 공포 스릴러 영화를 만든 감독답지 않게 순박하고 앳된 모습이었다. 말투 역시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예술세계를 ‘피력’하는 중견 감독들과는 달랐다. 느릿느릿 다소 어눌하게 자신의 얘기를 풀어갔다.
고교 때까지는 막연하게 영화감독을 꿈꿨다. 영문과에 진학해 영화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군대에 간 후 고민을 시작했고, 제대 후 사설 영화제작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단편영화를 만들다보니 꿈은 구체화됐다.
“그냥 글(시나리오) 쓰는 게 좋았고, 영화 찍는다는 것이 재미있구나 느꼈지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에 들어갔다. 2010년 졸업 작품 ‘주희’로 ‘미장센 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미장센 영화제는 ‘황해’의 나홍진,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윤종빈, ‘늑대소년’의 조성희 감독 등을 배출한 흥행 감독들의 등용문. 최대 30분짜리 영화만 만들었던 그가 처음으로 ‘긴’(107분) 상업영화를 만들었다. 바로 ‘숨바꼭질’이다.
“괴담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어요. 괴담이라는 게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이런 저런 지점들이잖아요. 특히 무의식 속에 잠재된 현실적인 두려움은 가장 가까운 ‘집’에서부터 시작되지요.”
현관 초인종 옆에 써있는 의문의 낙서, 실제로 빈 집이나 남의 집에 숨어사는 사람들. 허 감독은 충격적인 괴담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 영화를 완성시켰다.
고급 아파트에서 완벽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성수(손현주)는 하나뿐인 형에 대한 비밀과 지독한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인물. 어느 날 형의 실종 소식을 듣고 수십 년 만에 찾아간 형의 아파트에서 집집마다 새겨진 이상한 암호와 형을 알고 있는 주희(문정희) 가족을 만난다. 영화는 사라진 형, 현관에 적힌 암호의 비밀이 풀리며 우리 집에 낯선 사람이 숨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뒤바뀐다.
이 영화에는 손현주 문정희 전미선 등 탄탄한 배우들이 나온다. 허 감독은 손현주에 대해 “연기력은 당연하고, 관객들이 감정이입을 잘 할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이면서도 예민하게 보이는 지점도 있다. 성수가 가진 결벽증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히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캐스팅”이라고 밝혔다. 문정희의 연기 변신은 놀랍다. 그는 “여배우로서 선뜻 하고 싶지 않은 역할일 수도 있는데 오히려 적극적이었다”고 전했다.
영화 속 주희는 “내 집이야”라는 대사를 유난히 많이 한다. 허 감독은 “더 안전한 곳으로,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 집에 대한 소유욕이 유난히 강한 현대인을 과장해서 보여주는 캐릭터”라고 부연했다. 주희의 딸이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것과 성수의 결벽증은 “눈병에서 연상되는 전염에 대한 공포, 불안감을 반영하는 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흥행할 줄 몰랐다. 손해만 보지 않았으면, 그래서 다음 영화도 찍을 수 있었으면 했는데 운이 좋았던 것 같다”고 전했다.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 등으로 한국영화에 대한 신뢰감이 생긴 연장선에서 개봉해 운이 좋았다는 뜻. 그는 “평소 공포영화를 좋아한다. 다음 작품도 갑자기 밝은 영화나 웃긴 영화는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꿈꾸는 미래는 어떨까. “당연히 봉준호 감독처럼 되고 싶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의미도 있고 사람들도 좋아하는 그런 영화를 하고 싶어요.”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
공포 스릴러 ‘숨바꼭질’ 허정 감독 “무의식 속 잠재된 현실적 두려움은 집에서 시작”
입력 2013-08-21 1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