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은 나이 50에 연극배우가 됐다. ‘왕년에 내가…’ 하며 내세울 만한 ‘연극의 추억’도 없는 이들이다. 겁 없이 연극무대에 도전한 그녀들은 7개월 만에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연극 극단 ‘엄반’까지 창단했다. 평범한 엄마에서 연극배우로 거듭난 50대 아줌마들. 그들을 지난 광복절, 경기 안양시 갈산동 평촌아트홀에서 만났다. 그녀들을 옭아맸던 일상을 걷어차는 유쾌한 반란,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지난해 4월 정경화 콘서트에 갔다 팸플릿을 봤어요. 집에 와서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죠.” 정삼영(52)씨를 홀린 것은 안양문화예술재단(이하 재단)의 공연참여 프로젝트 ‘엄마들의 유쾌한 반란’ 1기 단원 모집 팸플릿이었다. 재단은 ‘이제는 나를 찾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2012년 4월 18일부터 한 달간 단원을 모집했다. 조건은 안양시에 살고 있는 기혼여성으로 연극에 관심만 있으면 됐다. 모두 32명이 신청했다.
‘엄반’의 왕언니 이영미(55)씨는 “단원 모집 공고가 어린 시절 품었던 연극배우라는 꿈을 불러내줬다”면서 지난해 5월 25일부터 매주 금요일 평촌아트홀 연습실에서 스러져가던 꿈의 불씨를 키워나갔다고 했다. 단원 중에는 연극 무대에 서 본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이들을 비롯해 대부분이 ‘왕초보’들이었다. 자기소개로 시작된 수업은 자기 표현하기, 대사훈련 등 실기, 연극사 무대미술 등 이론 수업과 연극인 박정자, 연출가 오태석 등 쟁쟁한 연극인들의 특강이 이어졌다.
남편에게 등 떼밀려 시작했다고 털어놓은 권명순(53)씨는 “인문학하고는 거리가 멀었는데 수업을 받으면서 자꾸 책을 읽게 되더라”고 했다.
재단은 이들의 자기소개를 바탕으로 대본을 마련했다. 창작극을 하되 아줌마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고자 했던 것, 이씨는 “치매 시어머니를 4년간 모신 얘기를 했는데 어머니가 제게 들려줬던 말이 제목으로 뽑혔다”고 자랑했다. 정성을 다하는 그에게 시어머니는 ‘집에는 좋은 일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곤 했다고.
대본이 나오고 그해 10월 12일 본격적인 연기수업이 시작됐다. 연습에 들어가면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느껴야 했다. 권씨는 “이해가 빨리 안 되고, 기억도 잘 안 나고, 단어도 적당한 게 잘 생각나지 않아 내가 나이를 먹고 있구나, 그래 벌써 오십이 넘었구나”했다고. 이씨는 “고무줄놀이 장면이 나오는데 젊었을 때처럼 폴짝폴짝 뛸 수 없어 방해될까봐 빠졌다”고 아쉬워했다. 몸과 지력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열정만은 동생들 못지않게 뜨거웠다. 정씨는 “금요일 두 시간의 연습시간이 일주일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12월 29일 안양아트센터 수리홀에서 막이 오른 제1회 정기공연 무대에 오른 이들은 한바탕 신나게 놀았다. 남편과 아들딸들, 친지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제2의 인생, 그 막을 올렸다. 시어머니 역할을 맡아 열연을 했던 이씨는 “집과 교회만 오가던 사람인데 이번에 내 자신을 되찾아가면서 사람들이 내 삶에 들어오는 것을 봤다”며 눈시울을 살짝 붉혔다. 권씨는 “소풍 온 것처럼 즐겁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서 전에는 아이들 삶에 일일이 관여했는데 요즘은 각자에게 맡겨 놓게 됐다고 말했다. 권씨는 얼마 전 보육교사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연극을 하면서 마음은 너그러워졌지만 자기계발에는 더욱 부지런해진 결과다.
정씨는 최근 개인적으로 좌절감에 휩싸였는데, 연극 활동을 통해 자신감을 되찾았다고 했다. “똑똑한 두 언니한테 늘 치였는데 내가 더 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줘 뿌듯했고, 엄마를 지지해준 딸 둘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일 수 있어 기뻤다”는 정씨의 얼굴은 밝게 빛났다. 성격차이가 나는 남편 때문에 속앓이를 해온 정씨는 요즘 그 속내를 권씨에게 털어놓으면서 위로를 받곤 한다. 연극배우가 돼 꿈과 자아를 실현한 것이 연극반 활동의 가장 큰 소득이라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난 건 더욱 소중한 덤이다.
권씨는 “연극은 생활의 활력소가 되며 자신감을 키워 준다”면서 아이들에게 너무 집착하거나 인간관계에 힘들어하는 엄마들에게 권하고 싶다고 했다. 연극하면서 사고의 폭이 넓어졌다는 정씨는 “일상에 지쳤거나 갱년기의 우울함에 빠진 엄마들이 하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자기 속에 있는 것을 표출해낼 수 있으므로 마음속에 쌓여 있는 것이 많은 아줌마라면 연극이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연극 아무나 하나? 이들은 “아이를 낳아 키운 엄마가 못할 일이 무엇이냐”고 입을 모았다. 이들의 극단 ‘엄반’이 바로 엄마들의 반란을 줄인 말이다.
50대 언니들과 자리를 같이 한 ‘엄반’의 대표 추성화(45)씨는 “요즘 우리 극단에 섭외가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의 하이 서울 축제에도 초대받았는데 스케줄이 겹쳐 참가하지 못했다”고 으스댔다. 엄반은 30∼31일 펼쳐지는 ‘2013 안양 아줌마축제’에도 초대받았고, 9월6일 안양여성협회주최 행사와 10월5일 안양축제에도 나선다. 또, 12월에는 정기공연 ‘세 여자의 여행이야기’를 무대에 올린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
“짜잔∼ 인생 2막은 내가 주인공”… 50대 아줌마들 배우 되다
입력 2013-08-20 1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