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칼럼] 복지는 시혜가 아닌 국가의 의무
입력 2013-08-20 17:30 수정 2013-08-20 22:57
“조세정의 입각해 부자에게 증세하되 보편적 징세원칙 재정립과 세정개혁 나서야”
무더위도 짜증나는 한여름에 한바탕 증세 논란을 겪었지만, 세법 개정안만 약간 수정한 채 중요한 결론이나 합의는 하나도 도출하지 못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증세도 없고 복지공약 축소도 없다”는 정부 방침만 확인됐다. 그러자 복지공약을 축소해야 한다거나 중산층은 증세를 원치 않거나, 원하더라도 내 주머니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입장과 부유층에 증세해서 복지 재원을 조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날카롭게 맞서고 있다.
결론부터 말해 복지도 늘려야 하고, 증세도 해야 한다. 다만 세금은 조세정의의 원칙에 따라 주로 부유층의 세 부담률을 높이되 보편적 징세 원칙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 보편적 징세란 소득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권 없이 과세 없다. 역으로 말하면 세금을 내지 않고는 투표권을 똑바로 행사할 수 없다. 나라살림을 위해 적게라도 돈을 내지 않으면 주인의식이 희박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11년 기준 근로소득자의 36.1%가 과세 기준점(4인 가구 기준 1800만원)을 밑돌아 세금을 한푼도 내지 않았다.
사회복지를 증진해야 하는 까닭은 자명하다. 경제력 집중으로 불평등이 심화되면 실업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범죄와 사회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돈 많은 사람들도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야 하고, 아이를 마음 놓고 학교에 보낼 수 없게 된다. 헌법은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지니며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증세를 할 여지도 아직은 충분하다.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은 2010년 기준 19.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24.6%보다 낮은 편이다. 1인당 국민소득 대비 복지 지출은 10%에 못 미쳐 OECD 회원국의 2분의 1∼3분의 1 수준이다. 일각에서는 증세가 기업의 투자 의욕을 꺾고 성장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유의 이론은 입증되지 않은 채 힘을 잃었다. 다른 선진국들은 국민소득이 지금의 우리나라보다 한참 적은 1인당 1만∼1만5000달러 때 이미 누진세를 포함한 주요 복지 제도를 완성했고, 국민소득의 20% 안팎을 복지에 지출하기 시작했다.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국가의 의무다. 또한 사(私)보험처럼 낸 만큼 받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누진적으로 내고 필요에 따라 받는 것이다. 따라서 부자에게 집중적으로 증세하는 것이 옳다. KDI 유종일 교수에 따르면 국내 조세의 소득재분배 기능은 OECD 평균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소득세 최고세율(41.8%)을 선진국(50% 안팎) 수준으로 올리거나 과표구간을 조정할 수 있다. 법인세도 재계의 주장과 달리 결코 높은 편은 아니다. 최고세율이 24.2%로 영국과 스웨덴보다 약간 높지만 일본(37.0%), 미국(39.1%), 프랑스(34.4%)보다 낮다. 금융소득, 부동산 등 재산 관련 세금도 인상 여지가 있다.
선별적 복지보다는 보편적 복지가 결국에는 더 호소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선별적 복지 제도에서는 소득이나 특히 재산을 기준으로 대상자를 선별할 때 사람들이 이를 숨기고 줄여서 보고하면 정작 필요한 사람이 못 받는 경우가 생긴다. 또한 선별에서 제외된 사람의 소득이 선별된 사람의 소득보다 적어지는 문제도 있다. 수급 자격자를 가리는 데 드는 적지 않은 행정비용도 문제다. 그럴 바에야 누구에게나 다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경제학자들도 많다. 보편적 복지에 해당하는 무상급식, 무상보육, 모든 노인에 대한 기초노령연금 지급 등은 선거공약 등에서 정치적으로도 선호되는 추세다.
세계적으로 저성장시대에 접어든 지금 복지 제도를 확대하지 않더라도 증세는 불가피하다. 부가가치세 도입이후 40여년간 세제가 근본적으로 바뀐 적이 없다. 증세와 세정 개혁의 대원칙을 세워야 할 때다. 주요 세목의 최고세율과 과표구간 조정, 직·간접세 비율 조정, 국세와 지방세 세목의 전환, 특정 정책목적 또는 보조금 성격의 과세감면 제도 폐지 등을 원론에서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