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남호철] 他人能解

입력 2013-08-20 17:31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에 운조루(雲鳥樓)라는 고옥이 있다. 조선조 영조 때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1726∼96)가 1776년부터 시작해 7년 만에 완공한 아흔아홉 간 대옥으로, 중요민속자료 8호에 지정돼 있다.

운조루의 사랑채와 안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곳간에는 통나무 속을 비우고 만든 원통형 쌀뒤주가 하나 있다. 쌀 3가마가 들어가는 뒤주 하단부에 가로 5㎝, 세로 10㎝ 정도의 직사각형 문이 있고, 이 문에 ‘他人能解’(타인능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이 구멍을 열 수 있다’라는 뜻으로, 누구라도 와서 쌀을 마음대로 가져가도 좋다는 의미다. 뒤주를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둬 가져가는 사람을 배려했다고 한다.

쌀 한 톨이 아쉬웠던 시절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보통 한 사람이 한두 되를 가져갈 뿐 주인이 보지 않는다고 몽땅 가져가는 이는 없었음은 물론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아예 가져가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내 배가 고파도 더 고픈 이들을 위하는 마음이 살아 있었던 셈이다.

이 같은 조상들의 나눔의 삶, 베풂의 정신을 이어받아 2000년대 초중반부터 ‘사랑의 쌀독’이 전국 곳곳에 등장했다. 각 기초자치단체는 쌀을 기부 받아 주민센터나 지하철 역사 등에 쌀독을 운영했다. 익명으로 남모르게 쌀을 기부하는 독지가도 줄을 이었다. 덕분에 쌀을 아무리 퍼가도 줄지 않는 ‘화수분’ 같은 쌀독도 적지 않았다. 광이나 마루 한구석에서 자물통으로 채워져 있던 쌀뒤주가 공공장소로 나오면서 세상을 훈훈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쌀뒤주가 일부 얌체족 때문에 텅텅 비어간다는 소식이 아쉬움을 남기게 한다. 지난 6월 중순 서울 지하철 2호선 당산역 개찰구 옆에 마련된 사랑의 쌀독에서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성이 쌀을 한번에 5㎏쯤 자루에 퍼 담아가다가 역장에게 걸린 경우도 있다. “다른 분들을 위해 조금만 가져가라”는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쌀자루를 메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런 몰염치한 양심불량자 때문에 서울 시내에서 사랑의 쌀독을 운영했던 9개 자치구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곳은 4곳뿐이다. 그나마 운영 중인 쌀독도 자율 대신 타율적인 방법으로 쌀을 지급하고 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린다더니 한두 사람의 욕심이 바닥난 양심을 보여주는 듯해 안타깝다.

남호철 논설위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