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3부) 한국,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다] (20) 대기업의 윤리경영과 사회실천

입력 2013-08-18 18:16


“회사 이익보다 공정경쟁 우선… 위반땐 관용없어”

16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지멘스는 독일 최대의 전기·전자기업이다. 세계 190여개국에 진출해 직원 수만 37만여명에 달하며, 연매출 783억 유로(약 117조원)로 2012년 포브스가 선정한 ‘글로벌 2000대 기업’ 중 대기업 부문 2위에 오른 명실상부한 독일 대표기업이다.

이런 지멘스에는 ‘CCO’라는 조금 낯선 직함이 있다. ‘Chief Compliance Officer’의 줄임말로 ‘최고준법책임자’라 불린다. 지멘스의 ‘준법(compliance)경영’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독일 본사와 세계 각국 지사에 있는 600여명의 준법지원인들을 지휘하는 자리다.

지멘스의 CCO 한스 요르그 그룬트만씨는 국민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준법경영은 지멘스에서 최우선순위에 있다”며 “지멘스에서 준법경영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비즈니스의 기본요소”라고 자사의 준법경영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2011년 기준으로 독일 기업의 52%가 준법경영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멘스처럼 윤리경영에 대해 체계적인 가이드라인이 있는 기업은 흔치 않습니다. 지멘스는 2001년 미국 상장을 계기로 사업행동강령을 제정했고, 2006년 CCO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지멘스를 모델로 삼아 준법경영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기업들이 있을 정도지요.”

실제로 지멘스는 준법경영 분야에서 독일을 넘어 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 주식시장의 다우존스지수로 유명한 ‘다우존스’는 해마다 기업들의 지속가능경영지수(DJSI)를 발표하는데, 지멘스는 2012년 준법경영 부문에서 100점 만점에 100점이라는 최고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이 같은 준법경영 성과 뒤에는 뼈아픈 부패 스캔들이 있었다. 지난 2006년 지멘스가 4억6000만 유로(약 7000억원)에 이르는 비자금을 조성해 그리스와 리비아, 아르헨티나 등에서 계약을 따내기 위해 거액의 뇌물을 뿌린 사실이 적발됐던 것이다. 지멘스의 이미지는 실추되고 다른 기업과의 제휴와 계약이 잇달아 연기됐다. 주식은 글로벌 경제위기와 겹쳐 1년 새 반토막이 났다.

“당시 수사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경영진은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100억 유로(약 14조8800억원)에 달하는 벌금과 공공계약 종료 등 장기적인 피해가 뒤따랐죠. 그러나 즉시 부패 척결과 청렴 프로그램을 시행하게 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투명성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지멘스는 준법문화 정착은 CEO의 강력한 의지를 바탕으로 ‘위로부터 시작된다(tone from the top)’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그룹 이사회와 수뇌부는 2년에 걸쳐 54개국 지사를 방문, 해당 지역 경영진을 직접 만나는 ‘준법 로드쇼’를 시작했다. 대상 지역은 사업 규모가 크거나 부패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들로 한국도 포함됐다.

“예방 차원에서 직원들의 준법교육도 진행했습니다. 지멘스 준법경영 교육의 독특한 점은 직원들끼리 교육이 이뤄진다는 겁니다. 준법책임자가 각 부서의 최고관리자를 교육하고, 최고관리자는 직속 부하직원을, 이 직원은 또 자신의 부하직원을 훈련하는 식으로 진행되지요. 다른 직원을 재교육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내용을 숙지하게 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룬트만 CCO는 이 같은 직원들 간의 준법경영 교육을 ‘청렴성 대화(integrity dialogue)’라고 불렀다. 1대 1 강의 외에도 온라인 프로그램을 통해 2007년부터 지금까지 30만명 이상의 직원이 준법교육을 받았다. 교육이 끝나면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커트라인을 통과하지 못하면 재시험을 봐야 한다.

“지멘스는 2008년부터 경영진 평가에 준법 항목을 넣고, 준법경영을 잘하는 경영진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잘못을 벌주기보다 잘하면 상을 줘서 장려하자는 거죠. 2008∼2010년 연간 성과 보너스의 20% 정도가 준법 관련 인센티브였습니다. 준법경영에 대한 보상제를 도입한 건 당시 전 세계 기업 중 지멘스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멘스는 내부고발을 위해 언제든 어떤 언어로든 신고가 가능한 핫라인 ‘텔어스(Tell Us)’를 구축했다. 지난해 모두 1700여건이 신고됐고, 그중 266건에 대해 징계조치가 내려졌다. 또 직원들과 외부인이 익명으로 비밀리에 부적절한 행동을 신고할 수 있게 외부 법률회사 소속 변호사를 독립적인 옴부즈맨으로 위촉해 활동하게 하고 있다.

“윤리경영 방침이 회사의 이익과 상충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지멘스는 공정경쟁 원칙을 위반한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용 원칙(zero tolerance)’을 지킵니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직급이든 절대 용인되지 않지요.”

흔히 윤리경영과 기업 성장을 상반되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지멘스는 경영성과를 통해 ‘정직이 최선의 방책’임을 입증해 보였다. 준법경영 시스템이 정착된 직후인 2009년 사상 최고 매출 실적을 기록했고, 2010년에도 순이익이 배로 급증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지멘스는 준법경영 노력을 회사 바깥으로 확장했다. 2009년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노력하는 기관과 프로젝트에 총 1억 달러를 지원하는 ‘지멘스 청렴 프로젝트(Siemens Integrity Initiative)’를 시작한 것이다. 2010년 첫 번째 그룹으로 20개국 31개 프로젝트가 선발됐다. 한국에서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부설 국제경영원의 ‘동북아기업윤리학교(Northeast Asia Business Integrity School)가 선정돼 10억원의 지원을 받게 됐다.

“한국 프로그램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대학생들에게 공정한 경쟁과 윤리적인 비즈니스 관행을 알리고, 청렴한 리더십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죠. 이런 윤리경영 정신이 학생들을 통해 비즈니스 커뮤니티를 넘어 한국사회 전반에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권혜숙 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