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재활용의 미학] 文化가 머무는 역… 藝術이 있는 창고

입력 2013-08-17 04:04


“건축이란 땅 위에 일으켜 세우는 개별적 건축물만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고 우리가 공유해야 마땅한 문화적 가치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건축가 정기용)

한여름 햇볕이 내리쬐던 지난 11일 오후 2시, 르네상스 양식의 붉은 건물 안으로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 손을 잡은 엄마들도 있다. 그들이 찾는 곳은 서울역. 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 기차가 드나들지 않는 옛 서울역이다. 낡은 역은 이제 ‘문화역서울284’로 불린다.

1925년 9월 지은 경성역은 광복 후 서울역이 돼 근현대사의 질곡을 견뎠다. 일제가 건설한 망국의 상징이자 6·25의 상흔을 간직한 곳이다. 60년대 이후 서울역은 상경하는 이들이 처음 만나는 우리나라 수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자가용 시대가 열리고 2004년 KTX 개통으로 신역사가 완성되자 옛 역은 제 기능을 잃었다. 버려진 빈 건물엔 갈 곳 없는 노숙인들이 모여들었다. 용도 폐기된 역사는 해가 갈수록 황폐해졌다. 문화재로서 위상을 정립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3년여 공사 끝에 2011년 지상 2층, 지하 1층의 원형이 복원된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새로 부여된 독특한 이름에는 목적(문화), 지역(서울), 가치(사적번호 ‘284’)가 모두 담겼다.

문화역서울284에선 요즘 아시아 대학생·청년작가 미술제 ‘아시아프’ 전시가 한창이다. 예스런 벽지 무늬와 창 모양이 고스란히 되살아난 부인대합실, 역장실 등 오래된 역사 구석구석에 개성 넘치는 미술 작품이 자리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머물렀다는 귀빈실의 대리석 벽난로 앞에서는 젊은 예술가의 비디오아트가 상영되고 있었다. 최초의 양식당 ‘그릴’은 다목적홀로 변했다. 3층 옛 이발실 자리에는 역의 본래 모습이 그대로 간직된 복원전시실이 마련됐다.

기념관을 둘러보던 김민석(19)군은 “문화유산이 잘 보존돼 자랑스럽다. 이런 게 하나하나 모여 과거를 증명하고 현재와 함께 발전해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주말을 맞아 아내와 함께 나왔다는 조현익(62)씨는 “역 근처라 오가기 편하고 기차역 자리에서 미술 작품을 보는 느낌이 이색적”이라며 “사라지면 다신 볼 수 없는 ‘역사’의 한 부분을 지금처럼 남겨두니 좋다”고 말했다. 조씨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없앤 중앙청도 남아 있었더라면 역사교육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문화역서울284의 민병직 크리에이티브디렉터는 “공간의 의미를 알아주는 분들을 볼 때마다 뿌듯하다”며 “전시 말고 건물 자체와 그 의미를 보러 오는 분도 많다”고 했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오전 11시 인천 해안동. 수탈의 관문인 개항장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벽돌 건물 사이를 견학 온 초등학생들이 줄지어 걷는다. 낡고 붉은 벽돌 위에는 ‘대한통운’ 네 글자가 세월에 빛이 바래 희미하다. 이곳 대한통운 창고(1948년 건립)에서 작가들이 ‘백령도 52560 시간과의 인터뷰’ 전시 준비에 한창이었다. 큐레이터들은 포스터를 들고 금마차다방(1943년 건립)을 오간다. 옛 삼우인쇄소(1902년 건립)에는 왁자지껄한 꼬마손님들이 구경을 왔다. 건물들은 각각 전시관, 커뮤니티관, 교육관 등으로 쓰인다. 1888년 지어진 일본우선주식회사 등 1930∼40년대 건설된 13개 동이 2009년 거대한 스트리트뮤지엄으로 거듭난 ‘인천아트플랫폼’의 풍경이다.

188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해안동 개항지는 근대문물의 관문이었다. 비교적 잘 보존됐지만 쓸모없이 방치되던 ‘근대’를 ‘재생’시키는 작업은 문화계에서 시작됐다. 예술가들이 개항지를 문화공간으로 꾸며 달라고 청원했다. 역사의 터전을 내버려두거나 새 것이 전부라는 생각으로 갈아엎어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인천문화재단이 이를 받아들였다. 비움과 채움, 기억과 향유, 소통을 콘셉트로 최소한의 신축 건물을 더해 2009년 개항지는 새 출발을 선언했다.

전국에서 수탈된 물자가 열강에 빠져나가던 이곳은 이제 세계적인 예술 교류의 ‘플랫폼’ 기능을 하며 미래를 꿈꾼다. 200여팀이 거쳐 간 레지던시에서는 현재 국내외 39팀 예술가들이 창작 지원을 받으며 작업 중이다. 이들은 시각예술, 공연예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해외 작가들과 국제 네트워크도 형성해가고 있다. 얼마 전엔 어린이 예술캠프도 진행했다.

인천시 관동 차이나타운에 점심을 먹으러 왔다 들렀다는 배연지(21·여)씨는 “아트플랫폼이라는데 건물 모양이 공장처럼 독특하다”고 말했다. 함께 온 김재석(23)씨는 “역사책에만 남을 뻔한 건물들을 보존해 창의적 공간으로 쓰는 것이 보기 좋다”고 했다.

이승미 관장은 “역사와 시간을 간직한 공간들, 쇠락하던 구도심이 인천아트플랫폼으로 재생되면서 창의 넘치는 새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용산 미군부대 반환지 등 역사적 사건에 연루됐던 공간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