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칼럼] 상생의 해방을

입력 2013-08-16 16:55


쌍방의 갈등을 해소하는 유형을 흔히 네 가지로 든다. 하나는 ‘너 죽고 나 살자’는 방식이다. 번번이 생기는 타살적 살상사건이 바로 그런 유형이다. 일종의 사디즘의 발로이다. 둘째는 ‘나 죽고 너 살자’는 방식이다. 흔치 않지만 자학적 자살행위가 그런 유형에 속한다. 일종의 마조히즘의 발산이다. 셋째는 ‘너 죽고 나 죽자’는 방식이다. 일제의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의 형태가 그러하고, 가끔씩 알카에다 집단이 저지르는 자폭테러가 그 전형에 속한다. 이 세 가지 모두가 유형의 차이는 있으나 극단적 내지는 부정적 이기주의의 발로임에 틀림없다. 쉽게 실현되지는 않지만 유일하게 긍정적이며 본받아야 할 네 번째 건설적인 방안이 있다. ‘너 살고 나 살자’는 유형이다. 갈등하는 쌍방이 같이 살자는 상생의 방식이다. 우리가 평화를 말하지만 진정으로 평화라 할 수 있는 것은 네 번째 방식일 뿐이다. 처음 세 가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일방적인 또는 쌍방 간에 폭력이 수반되고 심지어는 작고 큰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8·15 광복절이 지났다. 독립국가의 위상을 되찾은 날이기도 하지만, 의미로 보면 우리 민족 공동체와 민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식민지의 억압과 핍박에서 자유독립국으로, 자유인으로 해방된 축제의 날이다. 그래서 해방절이다. 그런데 이날을 두고 일본과 한국은 명칭도 다르게, 의미도 다르게 맞는다. 한국은 해방의 기쁨을 만세 축제로 기념한다. 일본은 희대의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맞는다. 한·일 간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방식은 무엇일까. 진정으로 누려야 할 ‘상생의 평화’는 무엇이어야 하나.

필자는 1986년 5월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열린 ‘일본 기독자교수 협의회’에 기조강연자로 초대받아 참여한 일이 있었다. 이런 제안을 했었다. 한·일 간의 진정한 평화와 화해는 양국이 8·15를 ‘공동의 해방일’로 경축할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할 것이며, 양국의 기독교 지성들이 먼저 이 운동을 시작하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또 식민지배 희생자인 한국은 이날을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지배에서 해방된 자유의 날로 삼고, 식민지배의 주체인 일본은 이날을 식민지배의 야욕과 억압의식의 악순환에서 해방된 자유의 날로 삼자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마라”(갈 5:1)는 말씀대로 일본은 식민지배라는 멍에에서, 한국은 식민 피지배라는 멍에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누림이 옳다고 말이다. 물론 반응은 “혼네(本音·속마음)” 그 자체였다. 비웃듯 격려하는 모습이 역력했었다.

마침 필자는 아직도 독일에서 독일교회 목회와 신학연구로 체류하던 기간인 84년 5월 4일, 소위 히틀러 나치가 무너지고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한 이날, 당시 독일(서독)의 대통령이던 폰 바이츠제커 박사가 국회의사당에서 하던 연설이 가슴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독일이 악의 지배의 화신에서 공적으로 해방된 날로, 악의 지배에 희생된 형제자매들에게 공적으로 사죄하는 날로 지키자”는 연설이었다. 실제로 당시 여론은 극우집단인 ‘네오 나치’를 빼고는 모두가 그의 연설을 숙연하게 청취했고 용감한 정치지성의 모범으로 칭찬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뭉클했었다.

그 후 2년이 지나 필자는 일본 기독지성에게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었다. 일본과 독일은 세계 제2차대전의 공범이지만 전후 복구에 있어서 경쟁하듯 다시 일어나 경제대국이 되었는데 왜 독일은 공개적인 사과와 함께 피해 배상에도 열심이지만 일본은 사과 대신 자기정당화에 열을 쏟고 사과행위가 없는가. 혹시 사죄와 중생의 복음을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 신앙이 일본 정신에는 스며들 자리가 없어서인가. 아직도 질문은 질문으로 남아있다.

이제 우리는 함께 결단할 것이 있다. 광복절은 과거 역사에 대한 회상적 기념일로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우리 속에 살아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념되려면 광복의 미래를 하나씩 미리 맛보는 축제여야 한다. 사실 미래 동북아 공동의 안보와 평화를 중심 삼아 새 관계를 정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철천지원수였던 독일과 프랑스가 화해하고 인적·문화적 교류를 강화하며 공동의 역사 교과서를 작성하게 된 일등을 거울삼아 한·일 간에, 한·중·일 간에 가능한 범위에서 공동의 새날을 준비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는 살아있는 한 전진한다. 또 그래야 한다. 우리 모두의 복된 미래를 위해서. 우리 모두의 보람된 상생을 위하여.

(경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