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박스 영상’까지 사고판다

입력 2013-08-16 05:08


2004∼2006년 경찰의 교통사고 뺑소니범 검거율은 73∼74%에 그쳤다. 범인 10명 중 3명은 수사망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 수치는 2007∼2009년 80%대에 올라서더니 2010년부터 93%로 치솟았다.

검거율 상승세는 차량용 블랙박스 보급 추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자동차에 장착돼 주행 환경을 촬영하는 블랙박스 보급량은 2008년 6만5000대에서 지난해 150만대로 급증했다. 올해는 250만대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요즘 뺑소니범은 이런 블랙박스가 잡는다. 경찰은 뺑소니 신고가 접수되면 사고 현장을 지나갔을 버스나 택시의 블랙박스 영상부터 수소문한다. 뺑소니 피해자들은 ‘목격자를 찾습니다’ 현수막을 내거는 대신 인터넷에 ‘블랙박스 영상 구합니다’란 글을 올린다. 뺑소니 현장 블랙박스 영상을 사고파는 중개 사이트까지 등장했다.

5월 초 밤 11시쯤 서울 신대방동 고가도로에서 외제차를 몰던 30대 운전자가 앞서가던 차를 들이받고 도주했다. 고가도로여서 방범용 CCTV도 없었다. 피해 차량 블랙박스 영상에는 뺑소니 차 번호판이 찍혀 있지 않았다. 경찰은 대신 이 영상에서 당시 현장을 지나친 다른 차량 6대를 확인했다. 그 운전자 6명 중 1명이 뺑소니 차량 번호를 기억해 이틀 만에 범인을 검거했다.

지난 9일에는 무면허로 외제차를 운전하다 뺑소니 사고를 낸 김모(28)씨가 현장을 지나던 다른 차량 운전자가 제보한 블랙박스 영상에 덜미를 잡혔다. 한 경찰서 교통경찰관은 15일 “블랙박스는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말했다.

뺑소니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은 먼저 현장에 간다. 목격자나 CCTV가 없을 경우 속수무책이던 과거와 달리 버스나 택시 회사를 수소문하면 뺑소니 현장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을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 있다. ‘도독코리아’란 인터넷 업체는 2011년 말부터 블랙박스 영상 거래를 중개하고 있다. 뺑소니 사건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을 피해자들이 구할 수 있도록 알선하는 것이다. 난폭운전, 신호위반, 버스전용차로 위반 등 교통법규 위반 현장이 찍힌 영상도 올라온다. 경찰 관계자는 “블랙박스 영상은 범인이 오리발을 내밀 수 없는 최고의 증거”라고 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