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흥우] 쿠오 바디스 국정원
입력 2013-08-15 17:35 수정 2013-08-15 17:36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정치적 시비에서 자유로우려면 대통령 측근 배제해야”
첩보영화 주인공들은 멋지다. 007 제임스 본드는 말할 것도 없고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는 못하는 게 없는 비범한 첩보원이다. 온갖 악조건을 이겨내고 ‘불가능한’ 임무를 완수하는 슈퍼 히어로다. 싸움의 대상만 다를 뿐 이들이 악의 무리를 응징하는 목적은 평화와 정의 구현에 있다. 영화는 정보기관과 그 종사자는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국가정보원은 최근 신입직원을 뽑았다. 국정원은 보수와 복지 면에서 대우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우수한 인재들이 대거 몰린다. 채용 공고는 지원자로 하여금 “합격하면 나도 제임스 본드나 이단 헌트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한다. “통일한국과 번영하는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일하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피와 땀을 국민에게 돌리며, 얼굴 없는 신화를 만들어갈 젊은 인재들의 도전을 기다립니다.” 젊은이들의 애국혼을 일깨우고, 심장을 뜨겁게 달구는 격문이다. 합격자들은 원훈(院訓)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을 가슴에 새기며 내곡동 청사에 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댓글 게이트’로 나라가 시끄럽다. 국가정보기관이 선거와 정치에 개입한 정황이 검찰 수사에서 밝혀졌으니 나라가 조용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검찰은 원세훈 전 원장 1명만 불구속 기소하고 댓글 관련 직원들을 전원 기소유예했다. 한 짓을 보면 처벌받아 마땅하나 직원들의 처지에 일말의 동정심을 느낀다. 자유와 진리를 외치면서 이와 정면 배치되는 댓글이나 달고 있으니 자괴감이 엄청 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 중에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지역감정 조장, 저주에 가까운 전직 대통령에 대한 모욕 글이 적지 않다. 일자일획 빼지 않고 인용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지면이 더러워질 것 같아 꾹 참았다. 이런 댓글을 남재준 국정원장은 “북한의 대남 심리전에 대응한 정당한 국가안보 수호활동” “이적활동을 색출하기 위한 대북 선전활동”이라고 주장했다. 전직 대통령 모욕 글은 “직원 개인 신분으로 단 것”이라고 했다. 국민이 믿을 거라고 기대하고 말한 건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와 같은 반열에 오를 희세(稀世)의 ‘명언’이다.
국정원은 방첩활동과 대테러활동, 산업스파이 색출 등 정보기관 본연의 업무를 강화하고,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등 새로운 국가정보기관으로 거듭 태어나겠다며 개혁을 약속했다.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 스스로 개혁을 얘기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정작 잘못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이나 사과는 없다. 국정원장의 일방적인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도, 직원 댓글도 “국가를 위한 충정”이라고 견강부회한다. 철저한 자기반성 없이 개혁이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학생들이, 교수들이 그리고 성직자들이 잇따라 시국선언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광장의 촛불은 사방 팔방으로 번질 기세다. 정보기관은 역사의 전환기마다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으로 변신하며 개혁을 다짐했다. 그러나 바뀐 건 포장뿐 알맹이는 정권을 국가와 동일시하는 출범 직후의 인식체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이런 곳에 대통령 심복들이 수장에 임명되면 ‘국정원 사유화’는 거의 필연적이다. 지금의 사단은 MB의 오른팔이라 불리던 원세훈 전 원장이 들어오면서 빚어졌다. 국정원이 정치적 시비에서 자유로우려면 원장 인사에서 대통령 측근을 배제해야 한다. 남 원장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정책 자문을 하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고, 18대 대선에서 국방안보특보로 활동한 측근이다.
전 CI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미국 정보기관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자 버락 오바마는 얼마 전 그 답을 내놨다. 오바마는 “(정보기관은) 안보와 자유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맞춰야 한다. 대통령인 내가 (정보기관 관리·감독) 프로그램에 신뢰를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국민이 신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정원 개혁도 이래야 한다. 박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도 국정원 개혁에 침묵했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