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맹경환] 미워만 해선 이길 수 없다

입력 2013-08-15 18:00


“아빠 안 보고 싶었어?”

“아니.”

“집에 오니까 좋지?”

“아니 일본이 더 좋던데.”

사춘기에 이제 막 접어든 둘째녀석의 말투는 역시나 무뚝뚝했다. 그래도 열흘 만에 집에 오고서 아빠도 안 보고 싶었고, 일본이 더 좋았다니. 그나마 미안했던지 녀석은 “이제 막 왔으니까 하루 이틀만 이해해줘”라며 위로했다. 적응 기간을 달라는 얘기였다.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는 “일본이 뭐가 그렇게 좋았냐”는 질문에 “사람들이 친절하다. 거리가 깨끗하다. 질서를 잘 지킨다”고 또박또박 답했다. 오랜만에 봤으니 가족 모두 외식에 나서는 길.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깜박였다. 늘 그래왔듯 바삐 건너려고 했더니 둘째가 저지를 했다. “아빠, 일본에서는 안 그래.”

TV에 독도 뉴스가 나올 때나 축구 한·일전을 할 때나 늘 일본이라는 말만 나오면 흥분하던 둘째를 도대체 뭐가 일본 팬으로 만들었을까.

둘째가 일본에 간 것은 매년 7월 후쿠오카시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 어린이 회의(APCC)’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APCC는 아시아·태평양 엑스포와 후쿠오카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89년 처음 열렸고 올해로 25회째를 맞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어린이 행사로 알려져 있다. 해마다 아·태지역 국가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후쿠오카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 어린이 40여개 팀이 참여한다. 올해는 25주년을 맞아 규모가 커져 56개 팀이 참여했다. 줄잡아 25년 동안 7000명이 넘게 일본 팬이 돼 돌아갔을 것이다. 조그만 지방자치단체가 25년째 이렇게 큰 행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과 함께 일본의 저력이 느껴졌다.

APCC의 모든 행사는 6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진행한다. 행사에 참여하면서 생기는 모든 비용을 스스로 부담한다. 둘째가 홈스테이를 하며 일본인의 친절함을 가장 많이 느끼게 해줬을 야마구치씨 부부는 둘째 편에 아기자기 여러 가지 물건을 싸서 보냈다. 정성이 느껴져 나까지 일본 팬이 될 뻔했다.

해마다 3·1절이나 8·15가 되면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한다. 일본 정부가 먼저 도발하고 자극하지만 우리 정부와 언론이 부추기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는 사이 전반적으로 국민들은 일본을 무시하게 됐다. 일본을 무시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뒤집어 보면 일본은 무시할 수 없는 나라라는 말도 된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말 국제통화기금(IMF) 기준으로 5조9809억 달러, 세계 3위다. 한국의 1조1635억 달러(15위)의 5배가 넘는다. 우리는 현재 1척도 없는 항공모함을 일본은 2차대전 개전 당시 10척 넘게 보유했다. 삼성 제품들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고 해서 한국 경제가 일본을 앞서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일본을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본을 참 모르면서 무시해 왔다”는 말을 한다.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한국 관광객은 200만명이 넘는다. 올해는 엔화 약세로 인해 상반기에만 전년 대비 40% 가까이 늘어 132만명이나 일본을 찾았다. 방일 외국인 중 한국인이 가장 많다. 그 많은 사람이 일본에 다녀오면서 일본의 진면목을 봤을 것이다.

그래도 근본은 흔들리지 않는다. 둘째는 홈스테이를 했던 친구 나오야네 책상 위에 붙어 있던 지도를 봤다. 독도가 ‘죽도’로, 동해가 ‘일본해’로 적혀 있는 것을 보고 화가 났다. 하지만 싸움이 날까봐 참았다고 한다. 미워만 한다고 이기는 것은 아니다. 그게 초등학교 6학년의 지혜다.

맹경환 국제부 차장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