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14세 남장 소녀 ‘금강산 유람’

입력 2013-08-15 16:42


호동서락을 가다/최선경/옥당

14세 소녀가 집을 떠나 며칠씩 혼자 여행하는 것은 요즘도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 19세기 조선시대 남장을 하고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 소녀가 있다. 글에 소질이 있던 소녀는 19년 뒤 여러 여행길의 기록을 담아 책까지 남겼다. 19세기 후반 한국과 중국 등을 여행하고 기록으로 남겼던 영국 여성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을 연상시킨다.

조선시대에 정말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당찬 이야기의 주인공은 금원(錦園)이다. 1817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그녀의 삶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김씨로 알려져 있지만 이 또한 확실친 않다. 1850년 그가 한문으로 적은 여행기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의 필사본 몇 점과 그녀를 언급한 기록이 조금 남아 있는 정도다. 한국사 속 여성 인물 발굴에 주력해 온 저자는 ‘호동서락기’와 관련 기록을 통해 금원의 삶을 오롯이 복원해냈다. 금원을 집중 조명한 책은 2년 전 동화작가 홍경의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오래된 꿈’ 말고 첫손으로 꼽힌다.

금원은 14세 때 부모를 졸라 금강산 유람을 떠난다.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마치 새장에 갇혀 있던 매가 새장을 나와 곧바로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기세이고 천리마가 재갈에서 벗어나 곧 천 리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출발에 앞서 남자의 옷으로 갈아입고 짐을 꾸려 먼저 사군(四郡)을 향해 길을 떠났다. 경인년 춘삼월, 내 나이 바야흐로 열 네 살이었다. 머리를 동자처럼 땋고 가마에 앉았는데, 가마 안은 푸른 휘장을 두르고 앞은 훤하게 트여 있었다.”

여기서 사군은 충청도의 제천, 단양, 영춘, 청풍을 말한다. 금강산을 가려면 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수로를 이용하는 게 빨랐기 때문이다. 금원이 어디에 머무르고 어떻게 이동했는지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호동서락기’의 일부 표현과 당시 양반들의 여행 관행으로 미뤄 30여일 넘게 시종과 함께 가마를 타고 여행했을 것으로 저자는 짐작한다.

이 여행을 마친 뒤 금원은 ‘금앵’이라는 이름의 원주 관기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841년쯤 규당학사 김덕희의 소실이 됐고, 그가 의주 부윤으로 발령받자 동행하며 평안도 관서지방을 여행한다. 1846년 한양으로 돌아온 뒤 남편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용산 삼호정에 머물며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과 시(詩) 모임을 가졌다.

그가 여행기를 쓴 것은 1850년이다. 금원은 “마침내 한번 웃고 붓을 당겨 유람의 전말을 대략 기록하니 유람한 곳은 호수가 있는 4군에서 시작해 관동 금강과 팔경을 돌아 한양에 이르렀고, 관서의 용만에 이르렀다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으니 이름하여 ‘호동서락기’라 한다”고 적었다. 산문 위주의 글에 시 26편이 섞여 있고, ‘삼호정 시회’의 멤버였던 여성들의 추천사도 덧붙여 있다.

저자는 “당시 유행했던 금강산 유람과 시 모임을 하며 풍류를 즐겼던 금원의 삶은 우리가 알고 있던 조선시대 여인들과 분명히 다르다”며 “‘호동서락기’ 역시 여성이 쓴 금강산 유람기라는 점 때문인지 널리 필사돼 읽혔다”고 소개했다.

실제로 1925년 금강산을 찾은 독일인 베버 신부의 기행글에 언급됐고, 현재 남아있는 것들 역시 필사본 2점이다. 금원의 삶뿐만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조선 사회에 대한 통념과 많이 달라 더욱 흥미롭게 읽힌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