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詩 ‘간’ 빼어난 일제 저항시…세계서 유례없어”
입력 2013-08-15 05:17 수정 2013-08-15 05:26
광복절 맞아 재해석 책 낸 설성경 연세대 명예교수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너는 살찌고/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거북이야!/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프로메테우스(푸로메디어쓰) 불쌍한 프로메테우스(푸로메디어쓰)/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푸로메드어쓰).
일제시대 대표적 저항시인인 윤동주 선생. 그는 1941년 쓴 저항시 ‘간(肝)’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은 ‘간’에서 시인의 희생적 자아를 드러냈다고 해석해 왔다. 그러나 연세대 설성경(사진) 명예교수는 “오히려 ‘간’은 일제시대의 가장 저항적인 시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심판시”라고 강조했다.
연세대 중앙도서관에서 13일 만난 설 교수는 기자를 윤동주 기념물 앞으로 데려갔다. 이어 비장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윤동주의 서시를 읊기 시작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설 교수는 “윤 선배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선배의 잊혀진 시를 연구했고, 이를 통해 우리 문학의 광복을 바랐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설 교수는 광복절을 맞아 “윤동주의 ‘간’(肝)에 형상된 ‘푸로메드어쓰’ 연구-풍자적 저항시로 부른 대한독립의 노래”라는 저서를 냈다. 설 교수는 ‘춘향전’의 저자를 밝히고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는 등 한국 고전소설의 난제를 해결해 온 전문가다.
설 교수는 저서를 통해 ‘간’은 시인의 희생적 자아를 드러낸 시가 아니라 가장 저항적인 시이자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심판시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놨다.
설 교수에 따르면 그동안 학계는 ‘간’의 핵심 시어인 ‘푸로메디어쓰’, ‘푸로메드어쓰’를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어 신의 저주를 받고 매일 재생되는 간을 독수리로부터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오기로 간주해 왔다. 이를 토대로 최동호, 마광수 등 기존 학자들은 ‘침전하는 푸로메드어쓰’를 시적 자아인 윤동주의 상징으로 봤다. 순수성(불)을 상실(도적)한 시인 자신에 대한 비탄으로 해석한 것이다.
설 교수는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의 의도적 변형인 ‘푸로메디어쓰’를 통해 윤동주가 ‘가짜 영웅’ 일제의 패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마지막 행의 ‘푸로메드어쓰’는 일본 군국주의의 핵심 그룹을 지칭한다. 설 교수에 따르면 시인은 우리나라(불)를 빼앗고 착취(도적)한 일제에게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설 교수는 “성서(막 9:42)에서 가져온 이 표현은 예수가 지옥과 사탄을 이야기할 때 사용했다”며 “시의 바탕에 기독교주의적인 민족주의가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설 교수는 특히 윤동주의 시가 다른 저항시보다 한 수 위의 경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육사, 한용운 등의 시에 등장한 저항은 아래에서 위로의 저항이고, 세계문학의 모든 저항시들이 택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며 “하지만 이 시는 역사의 이름을 빌려 가짜 영웅을 내치는 심판시이자, 동서양 신화의 접목이라는 측면에서도 탁월한 시”라고 평가했다.
연희전문 24년 선배인 윤동주를 학부 때부터 동경하던 설 교수는 저평가된 시 ‘간’의 본래 의미를 되찾아주기로 오래전부터 결심했다. 2009년 정년을 마친 설 교수는 그간 준비 작업을 통해 올해 2월 윤동주 추모회에서 본격적인 연구를 선포했고, 지난 6개월간 이 연구에만 몰두해 왔다.
설 교수는 “‘간’만큼은 아니지만 곡해된 일제시대 작품이 상당하다”며 “윤동주 연구를 마무리하는 대로 김영랑 시인에 대한 연구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