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근대문학관 건립의 첫 삽
입력 2013-08-14 18:08 수정 2013-08-14 19:55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7일 여름휴가를 마친 뒤 첫 일정으로 인문·문화계 인사들을 만나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이 그날 “인문학을 인간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라고 생각한다”며 “인간을 이해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삶의 길을 밝혀주는 지혜의 등불로, 저도 과거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낼 때 고전과 인문학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소개한 것은 인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 인문학의 주춧돌이라 할 문학계의 현안으로 떠오른 것이 근대문학관 건립이다.
근대문학관 건립 논의는 1996년 ‘문학의 해’를 맞아 처음 제기됐으나 이듬해 닥친 외환위기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다가 지난해 도종환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에서 건립 여부를 질의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논의는 지난 6월 도종환 의원실과 한국작가회의가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한 ‘국립근대문학관 조성을 위한 토론회’를 거쳐 현재 문화부 산하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연구용역에 들어간 상태이다. 우선은 타당성 조사를 거쳐 내년쯤 어떻게 문학관을 설계할 것이냐 문제를 놓고 중국, 일본, 유럽 등지에서 운영 중인 문학관 탐방을 통해 실질적인 모델링 작업에 들어갈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문단 안팎의 시선은 과연 박근혜 정부에서 근대문학관 건립을 위한 첫 삽질이 가능할 것이냐에 모아지고 있다.
베이징 차오양취(朝陽區) 문학관로에 자리 잡은 중국현대문학관의 경우 문학 관련 시설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1만여평에 달하는 부지엔 현재의 문학관 외에도 후세의 문학 관련 자료들을 위한 제2의 문학관이 들어설 미래지향적인 공간까지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귀감이 될 만하다. 남북 분단의 비극적 근현대사를 통과해온 우리로서는 장차 통일 시대에 대비한다는 의미에서도 남북한 문학인의 문학적 성과를 망라할 공간을 미리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런 공간을 갖춘 문학관 부지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도종환 의원 측이 한때 덕수궁 석조전을 염두에 두었으나 석조전은 리모델링을 할 수 없는 문화재청 관할의 등록문화재인 데다 공간 또한 협소한 까닭에 논의에 그치고 말았다는 후문이다. 서울 내에서 마땅한 부지 선정이 어렵다 보니 기왕 정부청사도 세종시에 내려간 마당에 대전에 있는 구 충남도청 부지가 어떠냐는 의견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임기 중에 근대문학관을 기공할 의지가 박근혜 정부에 있느냐는 점일 것이다.
기왕에 인문학을 통한 문화융성의 기치를 올린 마당에 명분은 차고 넘치지만 임기 중에 달랑 삽질만 해놓고 정작 준공식은 차기 정권에 넘겨야 한다는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부 관료들이 총대를 메겠느냐는 것이다. 덧붙여 예산 확보도 문제일 터이다. MB 정권이 미리 당겨 쓴 예산이 22조원에 달하는 마당에 문학관 건립 예산을 어디서 조달하느냐 역시 고민거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종래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감안, 지난 6월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세미나 제목이 ‘국립근대문학관 건립을 위한 토론회’가 아니라 ‘국립근대문학관 조성을 위한 토론회’로 정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단어 하나를 사용하더라도 현 정권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물꼬를 트고 있는 것은 한국근대문학 100년의 숙원 사업이 성공적으로 닻을 올리길 기대하는 문학인들의 염원을 반영한 것은 물론이다. 이런 염원을 감안한다면 요즘 스타 마케팅 효과를 노린 대형 뮤지컬 후원 등으로 치우친 기업 메세나 활동이 인문학 육성을 위한 지원 쪽으로 좀 더 옮겨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근대는 가난했고 우리 문학은 충분히 가난을 먹고 성장했다. 그런 마당에 문학(인)에게 좀 더 가난을 먹고 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