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 없는 복지 딜레마] 朴 대통령 ‘세금의 덫’
입력 2013-08-14 04:58
박근혜정부가 ‘증세 없는 복지’의 모순에 봉착했다. 새 정부의 대표적인 국정과제인 ‘국민행복 시대’를 열자니 재정 마련이 어렵고, 그렇다고 집권 첫해부터 박 대통령의 대선공약을 수정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형국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벌써부터 “복지와 경제성장, 경제민주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현 정부의 국정운영 기조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게 아니냐”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 8일 발표된 세제 개편안은 정부의 이 같은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세금을 올리지 않고 복지재원을 마련하려면 경기활성화가 필수불가결한데, 올해 우리 경제는 지난해보다 더 나아진 게 없었다. 그러자 정부는 이미 청와대와의 조율을 통해 확정한 135조원의 ‘140개 국정과제 재정 실행계획(공약가계부)’을 실천하기 위해 서민·중산층 세금공제 대폭 축소라는 전략을 택했다. 복지재정 마련을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던 셈이다.
이 세제 개편안이 ‘세금폭탄’ 논란 속에 박 대통령의 ‘원점 재검토’ 지시로 불발됐지만, 정부 입지는 더욱 좁아진 모양새다. “서민·중산층이 아니라 대기업·고소득층들로부터 세금을 더 걷으라”는 정치권의 요구에 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정부가 과감하게 법인세 증세나 각종 기업 세제공제 혜택 축소 등을 쉽게 택하지 못하는 것은 자칫 이런 방법이 국가경제 전체를 장기불황의 늪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안 그래도 잔뜩 움츠린 대기업들이 국내 투자는커녕 해외 투자로만 눈을 돌릴 수 있다. 기업 투자가 축소되면 일자리 창출과 창조경제 같은 박근혜정부의 또 다른 국정과제들은 아예 손도 못 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대기업의 소극적 투자는 이미 세수 축소로 현실화되고 있다. 올 상반기 세수 실적은 기업들의 영업이익이 급락하면서 92조1877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01조5938억원)보다 9.3%나 떨어졌다.
대선후보 시절부터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서도 복지재정을 마련하겠다”던 박 대통령의 약속도 제대로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재벌·고소득층에 대한 강력한 세무조사는 이들의 반발에 부딪혀 지지부진한 반면, 기업들은 세무조사가 무서워 공격적 투자에 나서지 못하는 ‘부작용’이 커지는 상태다.
한 경제 전문가는 13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국가정책이란 게 서로 충돌하게 마련이고, 정부는 이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게 국정”이라면서 “복지를 하겠다면 증세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설득하거나, 증세가 안 된다면 복지공약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니냐”고 했다. 그는 “경제민주화와 경기활성화, 보편적 복지를 동시에 말하는 박 대통령의 메시지도 문제”라고 말했다. “세 가지 모두 정부의 지향 목표는 될 수 있지만, 한꺼번에 이뤄지기는 힘든, 서로 모순된 과제”라는 지적이다.
여권에서도 “차제에 새 정부의 복지공약 수정 문제를 검토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심재철 최고위원은 국회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공약 전체를 다하겠다는 데서 (문제가) 출발한다. 기초연금·무상보육·고교무상교육이 이런 상황에서 되겠는가. 세금 없는 복지는 없다. 솔직하게 국민들한테 얘기하고 근본적으로 그런 고민을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정병국 의원은 “근본적으로 복지공약을 어떻게 이행할 것이냐와 세제 개편 문제를 같이 접근해야 한다”고 가세했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