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의 시편] 어디 고당 같은 분 없을까요?
입력 2013-08-13 17:07
고당 조만식은 1922년에 필자가 섬기는 산정현교회의 장로가 되셨습니다. 광복 68주년을 맞으니 그분 생각이 많이 납니다. 당리당략에만 매달리고 표만 생각하면서도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인들이 많은 요즘 고당 같은 분이 그리워집니다.
남강 이승훈에 의해 오산학교를 섬기게 된 그는 점차 기독교사상으로 무장한 민족 지도자로 변모했습니다. 고당은 1919년 2월 남강을 돕기 위해 오산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3·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으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죄로 평양형무소에서 10개월간 복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였습니다. 학교에서도 사람을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라고 강조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학문을 잘해서 남에게 뒤지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펼칠 때에는 성경적 원리대로 비폭력을 적용하셨습니다. ‘오산70년사’에 의하면 양복을 입으시던 그가 어느 예배 시간에 물산장려를 말하다가 즉석에서 입고 있던 양복과 모자를 찢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나라가 독립하기까지 절대로 양복을 입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줄곧 짧은 무명 두루마기와 말총 모자를 썼으며 고유의 짚신을 신고 다녔다고 합니다. 고당의 영향을 받은 제자 주기철 목사님도 죽는 날까지 검은 두루마기를 즐겨 입으셨습니다. 고당이 물산장려에 매달린 이유는 일제의 경제 침략을 막는 방책의 일환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일용품에서부터 일본 상품을 버리고 우리 물건을 쓰면 생산이 증대되고 우수한 산업국가가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생활 주변에서 한 점의 일본 제품이나 외래품도 찾아볼 수 없었고 명함조차 한지를 사용했습니다.
광복 후에는 북한의 동포들과 고난을 함께하기 위해 월남을 거절하셨습니다. 신탁통치 반대로 1946년 1월 고려호텔 2층에 감금되어 계실 때 숭인상업학교 제자인 나병덕이 서울로 모셔오려 하였지만 “나만 살겠다고 나를 믿고 있는 사람들을 버리고 올라갈 수 있느냐”고 하시면서 “나는 죽으나 사나 평양을 떠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때 평양에서 고당을 만났던 브라운 소장이 고당에게 “남한으로 가실 생각이 없느냐”고 하자 “나는 안 가요. 북한의 1000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했소. 북한을 떠나면 공산당 압제 하에 시달리는 북한 동포들은 구심점을 잃게 되는 것이니 이들과 고락을 함께 나누기로 결심했소”라고 답했습니다.
이런 고당 같은 분이 계셨기에 나라의 광복과 경제발전 그리고 민주주의가 꽃 피울 수 있었습니다. 고당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삶의 현장에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어디 고당 같은 분 없을까요?
<산정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