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범죄통로로 악용되는 차명계좌 금지해야
입력 2013-08-12 17:24 수정 2013-08-12 22:42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치적 중 하나가 1993년 실시한 금융실명제다. 가명거래를 없애고 실명거래를 하도록 함으로써 지하경제 양성화와 세원 확보에 획기적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의 이름을 빌린 차명계좌에 대해선 합법이라고 면죄부를 줌으로써 차명계좌가 비자금 조성이나 탈세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묵인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업 오너 비리나 금융 비리 수사 때마다 약방의 감초로 등장하는 게 차명계좌다. 재벌들은 임직원이나 임직원 가족 이름으로 차명계좌를 만들어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탈세·횡령·주가조작·증여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
지난달 구속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 이름까지 빌린 차명계좌 500여개를 통해 3000억원가량 재산을 숨겨온 사실이 검찰 수사에서 밝혀졌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2008년 특검에서 1199개의 차명계좌를 이용해 4조5000억원을 불법 관리해오다 들통났고, 태광그룹은 2011년 임원과 사원들, 거래처 관계자 이름까지 빌려 무려 7000개의 차명계좌를 만들어 3000억원대 비자
금을 관리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산을 숨기기 위해 노숙인 이름까지 빌렸다. 2006년 이후 차명계좌를 이용한 저축은행 비리 금액은 무려 6조7000억원대에 달한다. 저축은행이 이 정도이니 규모가 큰 은행이나 보험, 증권사 등의 차명계좌 규모는 어떠할지 가늠조차 어렵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지 20년이 된 만큼 말썽 많은 차명계좌에 대해 금지할 때가 됐다. 차명계좌는 대부분 탈세를 목적으로 하고 있어 조세정의와 형평성을 해친다.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는 차명계좌가 범람하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되는 이유다. 다만 부모가 자식 명의의 주택통장을 개설해주거나 동창회비·향우회비를 개인 명의로 해놓은 선의의 차명계좌에 대해선 예외를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 기존 금융거래 관행을 무시하고 차명계좌를 금지하면 막대한 혼란을 초래하고 선의의 범법자를 양산할 것이라는 우려는 타당한 측면이 있다. 지하로 숨어버리는 검은돈이 늘어날 것이란 걱정도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가서야 되겠는가. 차명계좌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선의의 차명계좌에 대해선 사전등록을 하면 용인해주는 등 예외 조항을 두면 된다. 범죄은닉이나 조세포탈 등 악의의 차명계좌에 대해선 과징금 부과는 물론 이름을 빌려준 사람까지 처벌해야 예방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미 여야 의원들이 차명거래 금지 법안을 발의해놓고 있는 만큼 보완책을 마련하면서 금융실명제가 제대로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