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성낙] 껴안기 인사와 우리네 문화 코드
입력 2013-08-12 17:33
“허그는 우리 생활에 스며든 역동적 아방가르드 정신과 개방성에서 비롯된 것”
얼마 전 독일을 방문한 필자는 옛 학우들을 만났다. 몇 해 만의 반가운 만남이라 모두가 서로를 반기면서 인사를 나누고 자연스레 허그(hug)를 하며 정을 나누었다. 그런데 문득 수년 전 일본에서 친한 동료 교수를 만났을 때 일이 생각났다. 반가운 나머지 그 교수와 허그를 했는데 다소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 허그 인사를 당한(?) 일본인 동료 교수가 두 팔을 아래로 내린 채 수동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쥐약이라도 먹은 듯한’ 눈빛에서 동료의 당혹감을 보았다. 반면 필자는 무슨 무례한 행동이라도 한 것처럼 머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돌이켜보니 일본의 동료 교수나 일본인 지인을 만나면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을 뿐 허그 인사를 한 기억이 없다. 허그 인사를 받은 그 동료 교수는 지난 수년간 ‘뇌일혈’ ‘고혈압’ ‘당뇨병’ 등의 합병증으로 거의 시력을 상실할 정도로 고생을 했다. 그런데도 굳이 일본을 방문한 필자를 만나겠다고 일부러 찾아왔기에 한편으론 안쓰럽고 한편으론 반가운 나머지 ‘껴안기 인사’를 한 터였다.
하루는 일본 대기업의 한국 지사에 근무하는 사원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도쿄에서 서울을 찾은 그 회사 부사장을 식장에서 만났다. 회사를 대표해서 축하의 뜻을 전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참석한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네 결혼 문화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일본과 다른 한국의 결혼 풍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무엇보다 축하객이 대형 홀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다는 사실에 놀랐고, 역동적인 축제 분위기의 열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또 귀엣말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장모가 사위로 맞이하는 신랑을 껴안아주고, 시아버지가 며느리로 맞이하는 신부를 껴안으며 따뜻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네 결혼 문화의 개방적인 분위기에 놀라워하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새롭기만 하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일본과 한국을 연이어 방문한 미국인 교수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일본학회의 초청을 받아 일주일간 일본에서 머물다 한국을 찾은 터였다. 저녁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그 미국인 교수에게 일본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느냐고 가볍게 물었다. 그랬더니 교수가 다소 엉뚱한 대답을 했다. “일본에서 일주일 동안 웃은 것보다 서울에 온 지 2∼3시간 동안 웃은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가 일본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자유롭다는 메시지였다.
일본 예술 문화계에서는 흔히 “일본에는 백남준이 없다”는 말을 하곤 한다. 일본 현대미술계를 살펴보면 작가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지 참으로 부러울 지경이다. 무엇보다 작가들의 작품 생활을 뒷받침하는 미술 시장이 매우 활성화돼 있다. 이는 우리네 미술 시장과 비교해보면 더욱 크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미술에 대한 일반인의 깊은 애정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도 미술 작품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 현대미술계는 아직도 구상(figurative)의 테두리에 갇혀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반면 국내 미술계에서는 추상(abstract) 작품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시쳇말로 추상 미술이 ‘대세’라고도 할 수 있다.
허그 인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의 개방성은 추상 작품이 ‘대세’인 미술계의 개방성과 무관하지 않은 성싶다. 아울러 허그 인사를 어색해하는 일본 사회와 구상 미술이라는 ‘고정된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는 일본 미술계의 현실 또한 서로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문화를 사랑한 한스 울리히 자이트 전 주한 독일대사는 “다이내믹을 넘어 아방가르드(avant-garde)”라고 한국 사회를 정의한 적이 있다. 오늘날 우리네 생활에 스며든 허그 인사법도 이런 역동적인 아방가르드 정신과 개방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 여성 대통령이 출현한 것도 ‘허그 인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우리네 사회 저변의 개방성 코드와 맥을 같이하는 것은 아닐까.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현대미술관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