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민원 줄여라” 당국 압박에… 업계 ‘악성 민원’ 골치
입력 2013-08-11 18:00
A씨(51)는 2008년 13개 보험사에서 중복 보장되는 16개의 보장성 보험에 집중 가입했다. 이후 A씨는 지난해 9월까지 473일간의 입원 기록을 만들었다. 당뇨병 등을 핑계로 입원이 비교적 쉬운 소규모 병원 10곳을 옮겨 다니며 ‘나이롱환자’로 생활한 것이다. A씨는 입원 중에도 계모임 참석, 모텔 숙박, 음주 등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했다.
A씨가 보험사들로부터 챙긴 입원 보험료는 지난달 경찰 조사 결과 3억953만6112원에 달했다. 누가 봐도 ‘허위 입원’ 성격이 짙지만 보험사들이 보험금을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민원의 무서움이었다. 보험사가 약관 위반 등을 들어 보험금 지급을 미루면 A씨는 곧바로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제기했다. 보험민원 축소를 강조하는 당국의 엄포에 빗발치는 민원이 성가셨던 보험사들은 보험금을 결국 지급해 A씨의 불만을 무마시켰다.
금융당국의 보험 민원 감축 대책을 악용한 세력들로 보험업계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11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인터넷 공간에서는 받기 힘든 보험금을 대신 받아주겠다는 단체도 등장했다. 손해사정사들의 모임을 표방하는 이들 단체는 양성과 악성을 구분하기 애매한 ‘경계성 종양’ 진단을 받았을 때 무조건 암 보험금을 타 주겠다는 식으로 고객을 꼬드긴다. 보험금을 원하는 만큼 받으면 성공 보수로 보험금의 일부를 챙기는 구조다. 이들은 보험금을 타낸 ‘성공사례’를 내세워 악성 민원인을 양산하고 있다.
손보업계에 따르면 자동차 정비업체 사이에서는 ‘보험사 대응방안’이라는 매뉴얼도 돌고 있다. 자동차 앞 범퍼가 살짝 긁힌 작은 사고에도 부품 전체를 교체하고, 보험사가 문제제기를 하면 그때 민원을 내면 된다고 가르치는 식이다.
한 손보사 관계자는 “보험사 입장에서는 민원이 들어오면 무조건 처리를 할 수밖에 없다”며 “보험 서류의 글을 읽어보면 누가 봐도 브로커가 낀 악성민원임이 분명하지만 무 자르듯 증거를 제시할 수 없어 답답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현재 보험민원은 2010년 4만334건, 2011년 4만801건, 지난해 4만8741건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에 금감원은 지난 1일 ‘보험민원 감축 표준안’을 발표, 보험사들의 감독·검사에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단계적으로 민원을 줄여 내년 말까지는 획기적인 수준으로 감축하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보험사들은 악성민원의 포함 여부를 전체 발생 건수에서 가려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민원 감축 기조를 악용한 세력 때문에 보험금이 새면 다수의 선의의 피해자들이 생겨난다는 우려도 나온다. “최수현 금감원장이 취임한 뒤 무리하게 보험민원 축소를 강조했다”는 볼멘소리도 있다.
민원 감축에 매달리다 보면 보험사들이 정작 집중해야 할 신상품 개발 등에는 소홀해질 것이라는 불만도 제기된다. 한 생보사 관계자는 “악성민원은 민원평가에서 제외하도록 하긴 했지만 평가에서만 제외됐을 뿐 발생 자체를 차단하지는 못할 것”이라며 “금융당국의 목표치가 너무 높아 업계로서는 고충이 크다”고 토로했다.
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