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신창호] 대통령은 휴가후 왜 칼을 빼들까
입력 2013-08-11 18:32
박근혜 대통령은 2주 전 아주 짧은 5일간의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절 온 가족이 함께 휴가를 보냈던 경남 저도에서 며칠 묵었고, 그 기록은 박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몇 장의 사진이 전부였다. 맥시 원피스와 비치용 샌들, 짙은 색 카디건 차림의 박 대통령은 국민들로서는 참 친근한 대통령의 모습이었다.
박 대통령은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첫 평일인 지난 8월 5일 오전 곧바로 대규모 청와대 인사를 단행했다. ‘왕 실장’으로 불리는 대통령 비서실장을 바꿨고, 민정·미래전략·고용복지 수석을 교체했다. 이른바 ‘여름휴가 구상’이 실행된 것이다.
우리 대통령들의 여름휴가 구상은 역사가 깊다. 직전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집권 첫해 여름휴가에서 돌아와 역시 당시 대통령실장을 다른 인물로 바꿨다. 미국산 수입쇠고기 파동으로 인한 ‘촛불 정국’을 돌파할 묘안을 휴가 내내 짜냈고, 결론은 대규모 인사로 현실화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휴가를 끝내면 개각 카드를 꺼내들곤 했다. ‘청남대 구상’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휴가기간에 장고를 거듭한 끝에 ‘금융실명제 실시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휴가기간을 국정운영 철학을 정리하고 연설 원고를 작성하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이 사이 국민들은 ‘국정의 수장’이 여름휴가를 나서면 온통 ‘갔다 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만 관심을 쏟게 됐다. 정작 대통령도 숨 가쁘게 일하다 잠깐의 망중한(忙中閑) 정도는 즐길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푹푹 찌는 여름이 되면 1주일 안팎의 휴가를 떠난다. 국내 피서지로, 해외 관광지로 떠나 오랜만에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대통령에 관한 한 이런 ‘사생활의 시간’은 없어도 되는 것쯤으로 여긴다.
매일 외신에 오르내리는 유명 외국정상들은 전혀 사정이 다른 듯하다. 반바지 차림으로 골프에 몰입해 있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모습은 이젠 구문(舊聞)이 된 것처럼 친근하고, 사람만한 물고기를 잡고 근육질 상반신을 자랑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사진 속 포즈도 낯설지가 않다. 그리스발(發) 유럽 금융위기가 몰아닥쳤을 때도 EU(유럽연합)의 돈줄을 잡고 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온천지로 2주 이상 휴가를 떠났다.
한적하고 나무로 우거진 길거리를 조깅 패션 차림으로 달리는 서방 정상들의 여름 휴가모습에선 세상만사를 잠깐 잊게 된다. 그리고 가끔씩은 “저 나라는 얼마나 안정돼 있어서 대통령과 총리 같은 자들이 저리 마음껏 휴가를 즐기나” 하는 생각에 부러울 때가 있다.
왜 유독 우리나라 정상들만 여름휴가가 그리도 짧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며, 휴가지에서도 내내 국정운영 고심에 심신을 다 맡겨야 할까. 왜 휴가에서 돌아온 대통령이 개각과 교체라는 칼을 꺼내들어야 하는 걸까.
아마도 우리 정치의 풍향계가 너무 빨리 방향을 바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국 흐름에 따라 기민하게 변신해야 하니 휴가지에서도 대통령은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틈이 생기면 무모해보일 정도로 저돌적인 공격을 가하는 반대세력, 이 세력을 뚫고 나아가야 하는 상황. 이 모든 걸 앞에서 마주하는 대통령이 과연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나 있는지 모르겠다. 언제쯤 ‘대한민국 대통령’이 2주간 휴가를 갔다는 뉴스가 나올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