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고난] 캄보디아서 교통사고로 사망 고 방효원 선교사
입력 2013-08-09 18:18
선교사역 17년… 캄보디아 부흥의 역사로
1996년 선교한국대회. 서울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대회에서 기도하던 그는 “주님이 부르시면 어디든 가겠다”고 서원했다.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가슴이 시원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선교의 부르심을 놓지 않았다. 같은 꿈을 가진 아내를 만나 함께 선교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복음을 전하러 가는 길, 주님은 이들 부부와 자녀 두 명을 하늘로 불렀다. 지난 6월 18일 캄보디아 현지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고(故) 방효원 선교사 이야기다.
◇서약서를 썼다=방 선교사와 부인 김윤숙 선교사는 2011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언어훈련을 시작하면서 소속 선교 단체인 인터서브코리아에 서약서를 제출했다. 이름하여 ‘장례계획서.’ 총 5쪽짜리 양식에는 선교지에 뼈를 묻을 각오로 떠나는 선교사들이 만일을 위해 자신의 장례를 단체와 후견인에게 위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의 글씨체는 차분했고 마지막 칸에 서명 날인했다.
방 선교사는 사망 1주일 전 아내 김 선교사와 함께 기도편지를 썼다. 편지엔 이사와 관련된 걱정을 내비쳤다. 이삿짐이 제대로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 좋은 현지인을 만나게 해달라는 간구였다. 방 선교사는 “하나님은 창세기 35장 1∼15절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셨다”며 “벧엘로 올라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고 하신 말씀을 붙잡고 이사를 준비한다”고 기록했다. 나머지 내용은 현지를 위한 기도였다. 캄보디아 교회 지도자를 위해, 현지 어린이 교육과 준비된 교사, 재정 지원과 언어의 진보를 위해 후원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안전한 여행을 위한 기도제목은 맨 나중이었다.
◇캄보디아를 사랑했다=방 선교사는 당초 태국이나 라오스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대학과 신대원 시절, 자신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은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기독교세가 약한 캄보디아를 선택했다. 거기서 현지인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그들과 함께 캄보디아 복음화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불교국가 캄보디아는 ‘킬링필드’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이었다. 1975년 급진 공산 무장단체인 크메르 루주가 집권하면서 20세기 가장 잔인한 대량학살이 자행됐고 그 여파로 90%의 불교 승려가 죽었고 기독교인도 피해를 입었다. 90년대 들어오면서 교회의 공개적 예배가 가능해졌지만 현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믿음이 약했다.
방 선교사는 ‘벧엘’인 시엠립에서 신학연장교육의 하나인 ‘TEE’ 프로그램을 통해 현지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를 훈련하고자 했다. 평소 온화했던 성격처럼 그는 철저히 헬퍼로 살려고 했다. 캄보디아 인구의 3.1%밖에 되지 않았던 기독교인을 선교의 주인공으로 세우고 싶었다.
대학 시절엔 청년들을 자신의 자취방에 데려다 먹이고 보살피던 그였다. 방 선교사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도편지를 보내 “현지 교회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게 해 달라”며 기도했다.
◇죽음이 선교였다=방 선교사가 시엠립으로 가던 날은 선교서약 이후 17년을 기다린 날이었다. 전도사와 목사로 12년, 타문화 선교훈련 3년, 그리고 캄보디아 현지 언어훈련 2년을 모두 마친 터였다. 이런 그를 하나님은 왜 데려갔을까. 인터서브코리아 이사장 이문식 목사는 “주님의 고난이 없이는 구원이 없고 우리의 고난이 없이는 선교도 없음을 가르쳐주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 목사는 “방 선교사 가족은 선교 준비를 하다 떠난 것이 아니라 사명을 다 이룬 것”이라며 “완성된 죽음”이라고 표현했다.
캄보디아 노진태 선교사도 “방 선교사는 사고로 생을 마감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불꽃을 던졌다”며 “불꽃은 캄보디아에 기적적인 회심과 부흥의 역사로 피어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방 선교사의 선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터서브코리아 관계자는 “방 선교사는 갔어도 하나님의 선교는 계속되고 있다”며 “캄보디아 선교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