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릴레이 나눔’ 확산] 밥값 미리 더 냅니다, 누군가를 위해…

입력 2013-08-10 04:02


‘서스펜디드 커피’(suspended coffee)는 익명(匿名)으로 커피를 기부하는 것을 말한다. 가게에 들러 커피를 주문하면서 여분의 값을 추가로 지불하는 것이다. 카페에서 선불로 계산해 놓은 커피를 추운 날 노숙인들이 와서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착한 기부 커피는 이탈리아 나폴리 지방에서 ‘caffe sospeso’(맡겨 둔 커피)라는 전통에서 비롯됐다. 한국판 이 운동이 지난 5월 ‘미리내’라는 이름으로 시작됐다.

‘서스펜디드 커피’는 약 100년 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지방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거의 자취를 감췄었다. 그러다가 2010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에 즈음해 이탈리아에서 ‘서스펜디드 커피 네트워크’란 페스티벌 조직이 결성되면서 다시 이어졌다.

이 운동은 자신의 작은 도움으로 어려운 지역 주민들을 위해 온정을 베풀 수 있어 미국, 러시아, 캐나다 등지에서 널리 전개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동서울대학교 전기정보제어공학과 김준호(41) 교수가 나눔문화의 자료를 연구하던 중 우연히 ‘서스펜디드 커피’ 운동을 알게 됐다. 이를 ‘미리내 가게’라는 이름으로 한국판으로 변형시켰다. ‘미리내’는 은하수의 제주도 방언이지만 글자 그대로는 ‘미리 낸다’는 의미를 줄여 만든 것이다.

김 교수는 창안, 기획과 구조, 운영 방법을 혼자서 구축했다. 대중의 의견을 듣기 위해 개설한 기부톡 페이지에 관련된 이미지를 게시했고, 호응을 얻어 개인들로부터 지원까지 받게 됐다. 기브네트웍스, 인쇄피아 등에서 운영팀 경비 일부와 간판·현판 제작 등을 지원해주고 있다.

미리내 가게 이용 방법은 식사나 그 이외의 서비스를 받으러 왔던 누군가가 본인의 것과 함께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해 놓는다. 업주는 미리내 쿠폰에 지불된 쿠폰 수만큼 표시해 두고 그것을 보고 온 누군가는 그 서비스를 아무런 조건 없이 이용할 수 있다.

기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특정 인물을 지정해 선물을 할 수도 있고, 아무나 이용하도록 할 수 있다.

미리내 가게는 어려운 사람(주로 노숙인)을 위해 커피를 맡겨두는 형태의 서스펜디드 커피 운동과는 조금 다르다. 서스펜디드 운동은 나눔이라기보다는 동정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해 나눔을 실천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사용자는 기쁨을 느끼고, 이 기쁨을 릴레이하는 식으로 나눔 실천 문화로 만드는 것이 미리내 가게의 목표다. 나누는 대상이 누구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것을 나누자는 마음이 일어나는 게 먼저고 그 대상은 그 이후에 결정되는 것이다.

미리내 가게 전국 1호점은 지난 5월 6일 경남 산청 ‘후후커피숍’에서 시작됐다. 8월 현재 서울 경기도 부산 대구 등 전국적으로 70개의 ‘미리내 가게’가 생겼다. 한 달에 20개 이상의 가게들이 늘어날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는 상황이다. 최근 시민들 간 나눔운동 추세에 비춰볼 때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미리내 가게’가 되기 위해서는 점주가 사장이어야만 되고 직접 신청하면 된다. 특별한 심사는 없지만 소규모 가게 중심으로 가입을 받고 있다. 가맹비나 가입비는 없다. 나눔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 가입된 가게들은 미래내 가게 운영진에 의해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해 가게 홍보가 이뤄진다. 도움을 주고 홍보도 되는 1석2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전국에 가입된 가게들은 음식점, 커피가게, 스크린 골프장, 명패 제작소, 마을기업 등 업종이 다양하다. 울산지역에는 6월 25일 북구 문화센터 내 ‘W커피’부터 시작돼 현재 19개의 미리내 가게가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매주 30∼40명의 이용자가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울산은 전국에서 미래내 가게 최다 가입 지역이다. 가입 대기 중인 가게도 20곳이나 된다. 울산 북구종합사회복지관의 다드림카페를 비롯해 중구의 돈가스 전문점 ‘돈까수’, 동구 프로방스베이커리 등이 있다.

W커피 정임숙(45) 대표는 9일 “장사를 하면서 할 수 있는 봉사나 나눔활동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었다”면서 “그러던 중 울산지역에서 활동하는 미리내 가게 활동가 이철호씨의 추천으로 미리내 가게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커피값을 직접 기부받거나 커피 쿠폰 도장을 기부받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이철호(33)씨는 “주부들과 학생들에게 손쉽게 기부와 나눔의 의미를 널리 전파하고 싶다”고 말했다.

울산=조원일 기자 wc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