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광형] 그림은 죄가 없다

입력 2013-08-09 16:54 수정 2013-08-09 17:08


그림이 문제다. CJ그룹 비자금 수사에서도 미술품이 도마에 올랐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압수수색에서도 마찬가지다. 전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씨 소유인 경기도 파주 시공사 압수수색에서 박수근 천경자 김종학 이대원 배병우, 프랜시스 베이컨(영국) 등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대거 나와 수백억대의 ‘검은돈’으로 산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2009년 삼성 특검에서도 미국 작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의 유통 경로를 두고 파문이 일었다. 최근 구속된 전군표 전 국세청장도 2007년 최욱경 화백의 ‘학동마을’을 한상률 당시 국세청 차장으로부터 인사 청탁 명목으로 상납받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림은 은밀하게 거래되는데다 언젠가는 값이 오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청탁의 대가로 활용되곤 한다.

그런 탓에 미술품이 비자금 또는 범죄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의 추징금 환수에 나선 검찰이 압수 미술품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고 한다. 국민들의 관심은 검찰이 얼마나 많은 돈을 추징할 수 있을까에 쏠려 있다. 하지만 미술계에서는 다소 부정적인 반응이다. 돈이 될 만한 그림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수근 천경자 등 ‘블루칩 작가’가 거론됐지만 판화인지 아트프린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전문가의 실물 확인도 없이 얼굴을 가린 채 피의자를 연행하듯 작품을 포장한 채 줄줄이 실어나갔기 때문이다. 박수근의 웬만한 작품 한 점이 몇 십억씩 호가하고 베이컨의 작품도 수십 억대에 달하니 모두 진품이라면 몇 백억으로 추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판화 또는 드로잉이거나 인쇄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값어치는 형편없이 떨어질 것이다. 이를 두고 검찰이 성과를 내보이기 위해 작가 명단을 흘린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체면이 구겨질 것이므로.

문제는 미술품이 죄인 취급을 받는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점이다. 배병우 육근병 주태석 등 이번 압수수색 목록에 포함된 작가들은 1990년대 시공사에서 출간한 ‘아르비방’ 도록에 참가한 이들이다. 어렵게 생활하는 작가들이 도록 비용 대신 그림을 출판사 측에 건넸고, 당시에는 작가들의 지명도가 높지 않아 그림값이 비싸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림이 매번 동네북이 되느냐고 미술계는 하소연한다. 몇 백억을 빼돌려 은닉한 사람보다 그 돈으로 그림을 사서 갖고 있는 경우, 현금보다 그림으로 갖고 있는 경우 사회적으로 훨씬 더 많은 비난을 받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미술품이나 서화 골동품이 범죄행위를 부추기거나 유인하는 것처럼 몰아가는 행태가 속상하다고 한다.

‘미술품=비자금’이라는 등식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미술계는 “말 못하는 미술품이 뭔 죄냐”고 토로한다. 순수 예술작품으로 얘기되지 않고 사건의 물증으로 다뤄지는 웃지 못할 현실이 씁쓸하다는 것이다. 미술품을 사고파는 물건으로만 보고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회야말로 정말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의 원인은 미술계가 제공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동안 그림 판매에만 열을 올렸지 감동을 공유하는 노력은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미술품이 일부 계층에서만 향유하는 ‘그림의 떡’이라는 선입견이 확산됐다. 뼈아픈 자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광형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