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네 다섯 가족 다섯가지 이야기

입력 2013-08-09 19:13


윤지야, 행복이란 뭘까?

“우리가 기뻐하는 거잖아”


“윤지 아빠는 어떤 분이지?” “어떤 아빠요?”

순간 기자가 당황하자, 윤지 아빠 김병년(48·다드림교회) 목사가 웃으며 말했다.

“윤지는 아빠가 둘이에요.” 2005년 8월 8일 태어난 윤지는 딱 3일 엄마 젖을 물었다.

그리고 바로 작은집으로 보내졌고, 2008년까지 작은 아빠·엄마 품에서 자랐다.

그러니까 윤지에겐 ‘목사아빠’ ‘작은아빠’ 둘이 있는 것이다.

지난달 31일 서울 하계동 윤지 집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비빔냉면을 먹으며 아빠와 어린 딸의 행복한 일상을 들었다.

김 목사는 페이스북을 통해 수많은 사람에게 일상, 신앙, 이웃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행복

-윤지야, 그럼 목사님 아빠는 어떤 분이야?

“음…, 좋은 분일 때도 있고 나쁜 분일 때도 있고. 저번에 놀다가 늦게 들어왔는데 아빠한테 혼났어요. 그땐 나빠요. 좋을 때는, 뭐 사줄 때요. 짜증날 땐, 아빠가 치카(양치질)하라고 하고 청소를 또 시켜요.”

-그럼 엄마는 어떤 분이야?

“어떤 엄마요?”

생각해 보니 윤지에겐 엄마도 둘이다. 그런데 아이는 알아들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가끔은 좋은 분이긴 한데…. 엄마는 누워만 계셔서 할 것도 없고. 패스!”

윤지 엄마 서주연(43) 사모는 윤지를 출산하고 3일 뒤인 2005년 8월 10일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이후로 지금껏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늘 침대에 누워만 있는 엄마를 본 아이로선 그 이상의 답이 없다. 엄마 젖 한번 제대로 빨지 못하고 태어나자마자 가족과 생이별한 아이, 엄마의 다정한 말 한마디와 눈빛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 그런데 매운 비빔냉면을 우유와 같이 먹으면서도 맵다는 말 한번 안 하는 씩씩한 아이, 윤지에게 물었다.

-넌 행복하니?

“네! 행복은 우리가 기뻐하는 거잖아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투다. 윤지는 온 가족이 웃고 기뻐하는 게 행복이란다.

만남

윤지 아빠는 1994년 10월 12일 선교한국 이대행 간사의 소개로 윤지 엄마를 만났다. 당시 아빠는 선교단체 한국기독학생회(IVF) 간사였다. 아빠는 엄마를 만나기 전 몇 명의 여성과 데이트를 했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거푸 퇴짜만 맞은 아빠.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이번엔 꼭 성공하고 싶었다.

-첫눈에 ‘이 여자다’란 생각이 들었나.

“내가 키도 작고 좀 왜소하지 않나. 그땐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매너도 꽝이었다. 여자들이 징징대면 짜증을 내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경상도 사나이였다. 아내를 만나러 가기 전, 성경에서 남녀가 만나 결혼하는 장면을 찾아 묵상했다. 아담과 하와, 이삭과 리브가, 다윗과 아비가일, 룻과 보아스…. 그들에겐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했던 거다. 오늘 만나는 자매도 믿음의 확신이 있다면 다를 거 같았다. 그래서 자매를 만나면 나의 삶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모두 이야기하고 프러포즈할 참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사모님이 한번에 승낙하던가.

“처음엔 놀라더라. 그러면서 결혼은 아직 모르겠지만 교제는 해보고 싶다며 반쯤 허락했다. 그렇게 사귄 지 한 달여 만에 결혼을 약속했고 석달 만에 양가 허락을 얻었다. 하지만 좀 힘들었다. 볼품없는 외모에 돈도 없고, 목사도 아닌 후원받아 생활하는 가난한 선교단체 간사를 환영해줄 부모가 어디 있겠나. 그런데 그 온순하던 아내가 ‘김병년 아니면 결혼 안 한다’며 시위를 하더라. 결국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사모님은 목사님 어디가 좋았다고 하던가.

“소개로 만났지만 아내는 그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 94년 한양대에서 열린 선교한국대회를 앞두고 나는 중보기도운동팀을 맡고 있었다. 거기에 아내가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물론 나는 아내를 몰랐다. 대회를 마치고 아내가 소개를 부탁한 거다. 장로님 가정의 맏딸로 새벽기도, 금요예배 반주자로 봉사했던 아내는 규율을 벗어나본 적 없었다. 의외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내가 부러웠다고 한다. 기도를 인도하고 메시지를 전할 땐 깊이 있고 진지하지만 쉬는 시간에 개구쟁이처럼 노는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고 하더라. 신앙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 배우자를 놓고 기도한 아내의 첫 제목이었다.”

고통

윤지 엄마는 건강했다. 언니(윤영·16)와 오빠(윤서·12) 출산을 위해 병원에 갔던 것을 제외하면 크게 아팠던 적이 없다. 2005년 막내 출산을 며칠 앞두고 아빠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엄마와 언니, 오빠를 데리고 서울 동덕여대 근처 한 카페를 찾았다. 그게 아빠 엄마가 손잡고 걸었던 마지막 데이트였다. 또 아빠가 수요 예배를 드리러 나가면서 한 말, “나 다녀올게”는 엄마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였다.

-쓰러지던 날, 이상 징후는 없었나.

“예배를 마치고 여느 때처럼 예배당 안을 정리한 뒤 꺼놓았던 휴대전화의 전원을 켰다. 음성 하나가 들어와 있는데 아내가 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거다. 막내 젖을 먹이던 중에 갑자기 쓰러졌다는 거다. 어떤 전조도 없었다. 급작스럽게 찾아와 내 모든 삶을 한순간에 바꾼 ‘쓰나미’였다.”

-무슨 힘으로 견뎠나.

“장모님이 1년치 간병비를 헌금으로 드리면 아내가 일어난다고 기도응답을 받으셨다고 하더라. 그래서 2000만원을 감사헌금으로 드린 적이 있다. 2008년 6월 IVF수련회 주강사로 서게 되어서 40일 작정기도를 드리며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피로가 몰려와 잠깐 졸았는데, 아내가 찜질기에 화상을 입고 만 것이다. 그 일로 아내는 한쪽 다리마저 잃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내를 ‘고쳐주세요’ ‘낫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때부터 하루하루를 살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무엇이 가장 힘든가.

“장모님은 지금도 아내가 낫는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내년에 일어난다고 응답을 받으셨다고 한다. 장모님과 신앙적 색깔이 다르니 힘들다. 내적으로는 내가 매일 아내를 사랑해줘야 하는데, 나도 가끔은 쉬고 싶다. ‘당신과 언약을 맺어 살아야 하지만 이런 삶을 계속 반복한다는 게 무척 힘들어’라고 되뇌이기도 한다. 이기적인 인간의 죄성 때문에 괴롭다.”

유혹

그런데 아빠에게 좋아하는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와 마지막으로 갔던 카페에 그 여성을 데리고 갔다. 커피를 마시면서 일상의 대화를 나눴고 아빠는 여성을 향한 감정을 잠재웠다.

-목사님도 흔들릴 때가 있었다니, 놀랍다.

“나도 인간이다. 목사라는 이유로 내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오픈하면서 위로받는다. 그럴 땐 숨길 게 아니라 드러내놓고 순간의 충동을 넘겨야 한다. 그러면서 거룩함을 찾아간다.”

-지금도 사모님을 사랑하나.

“모든 장애는 다 힘겹다. 뇌병변 1급 판정을 받은 아내는 자율신경을 잃은 탓에 입과 눈의 기능을 잃었다. 오직 듣는 기능만 살아 있다. 들을 수 있어 웃는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고 했는데 아내는 10년 가까이 듣기만 하니 얼마나 순종적인가. 그런 아내 앞에서 나는 쉬지 않고 말한다. 그렇게 떠들다 지치면 아내의 팔을 쓰다듬는다. 말하기와 쓰다듬기가 내게는 사랑을 전하는 유일한 도구다. 내 사랑을 표현하는 전부이기도 하다. 병든 아내를 품고 사는 것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품는 게 사랑이다.”

‘엄빠’

윤지 아빠는 참 많은 일을 한다. 엄마를 지키는 간병인이고, 윤지와 언니 오빠까지 세 아이를 양육한다. 또 260여명이 출석하는 서울 공릉동 다드림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다. 이런 아빠를 언니 오빠는 ‘엄빠’라고 부른다.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모두 한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다.

-엄빠 일상도 만만치 않을 텐데.

“아픈 엄마를 돌보는 것도 힘든데 아이들에게 더한 것을 요구하진 않는다. 나이가 어리다고 고통의 짐이 가벼운 건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울고 있는 나보다 먼저 고통을 웃음으로 바꿨다. 내가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씨름할 때 아이들은 이미 고통을 여섯 번째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었다.”

-목사님은 페이스북 스타이기도 하다. 페친이 얼마나 되나.

“1만명쯤 된다. 2011년부터 페북을 통해 엄빠의 일상을 전했다. 같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위로 받았다고 댓글을 많이 남겨줬다.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들이 내 엄빠의 일상에 특히 공감한다. 나는 개조한 승합차에 아내를 태우고 데이트를 다닌다. 그때 페북에 ‘우리와 같이 놀자’고 번개모임을 제안한다. 10명 가까운 페친들이 함께해준다. 사람들은 장애인 가족을 노출하는 것을 꺼린다. 그러나 누군가 함께하면 용기를 낼 수 있다. 페친들이 내게 그런 용기를 준다.”

-최근에 책도 출간했다.

“세 번째 책이다. 페북에 올렸던 내용을 묶었다. 제목이 ‘아빠, 우린 왜 이렇게 행복하지?’(포이에마)다. 윤지가 내게 한 질문이었다. 가난은 ‘돈이 없는 것’이고 행복은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 윤지 눈에 우리 가정은 가난하지만 같이 웃을 수 있어 행복하다는 거다.”

-목사님은 행복한가.

“둘째 윤서가 노회 교회학교 주최로 열리는 성경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가정은’이란 질문의 정답은 ‘화목한 가정’이다. 그런데 윤서가 자꾸 엉뚱한 답을 썼다. ‘우리집’이라고. 막내를 괴롭히는 녀석을 보면 화목과는 거리가 먼데 윤서는 한결같이 ‘우리 가족이 얼마나 화목한데’라고 말한다. 고통 속에서도 충분히 기쁨을 누리는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하다.”

-기대하는 소망이 있다면.

“믿음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섬기며 삶의 여정을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 있어 아픈 엄마지만 옆에 있어주는 게 중요하다. 아내가 오래 살아줬으면 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 엄마 아빠가 사랑하는지를 아이들이 보고 배운 뒤 훗날 많은 사랑을 베풀며 살기를 바란다.”

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