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지도의 탄생/대니얼 로젠버그·앤서니 그래프턴/현실문화
시간에 맞춰 사건을 단순 나열한 연표. 역사책 뒷장에 등장하는 이 연표는 오랫동안 역사를 기록하는 단순 보조 수단 정도로 치부되며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긴 글보다 도표 하나, 그림 하나에 정보를 압축해 담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싶어 하는 지적 욕구는 언제나 존재했다. 실제로 때론 잘 정리된 연표 한 장이 역사책 한 권보다 더 일목요연하게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지 않던가.
그래서 고대와 중세, 어느 시대를 가릴 것 없이 역사가들은 저마다 나름의 연대기 표기법을 갖고 있었다. 열정적인 누군가의 손에서 ‘계보 나무’와 같은 독창적인 기록 정리 방법이 탄생하기도 했다. 21세기 현재 중요한 정보 제공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는 ‘인포그래픽(Infographics·복잡한 정보를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이런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저자들은 그동안 역사학계에서 방치했던 연표에 숨을 불어넣었다. 단순한 기록 보조 장치가 아니라 당대의 지식과 세계관, 창의성이 축적된 산물임을 보여주며 새롭게 ‘연표의 역사’를 써내려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연표는 BC 264∼263년, 그리스인이 대리석에 통치자와 주요 사건, 발명품의 목록을 새긴 것이다. 4세기 이후 연표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한 건 로마의 신학자 에우세비우스였다. ‘교회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페이지 꼭대기에 가로로 왕국을 나열하고 세로줄에 연도를 배열한 형식의 표에 기독교의 역사를 빼곡히 정리했다.
서양에서 연표 제작의 중요한 동력이 됐던 것은 바로 성경의 역사를 알기 쉽게 정리하는 것이었다. 15세기 수도사이자 역사가인 베르너 롤레빙크와 독일의 역사가 하르트만 셰델에 와서는 ‘연대기’에 그림이 덧붙여지며 한층 더 다양하고 복잡해진다. 특히 셰델은 ‘뉘른베르크 연대기’에서 종말까지 남은 시간을 공백으로 처리하며 어떤 글보다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예수를 비롯해 성경 속 인물의 가계도를 그리는데 나무 형태의 계보가 자주 등장했다. 움직이는 팔을 가진 원형 형태의 ‘볼벨’도 여러 면으로 활용됐다.
19세기 미국에서는 선교 과정에 연표가 동원됐다. 연표 하나 때문에 카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이 고조된 사건도 있다. 프랑스계 캐나다인 카톨릭 사제 프랑수와 노르베르 블랑셰는 1839년 ‘카톨릭의 사다리’라는 연표를 제작했다. “시각화한 교리문답”이라는 그의 설명처럼 천지창조에서 시작해 노아의 방주, 예수의 생애 등 중요한 사건들이 기록됐다. 문제는 종교개혁을 연표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뻗어나간 나뭇가지로 표시하고, 루터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을 작은 막대로 처리한 것이다.
이는 신구교 신자들 사이에 격렬한 갈등을 낳았다. 결국 1845년 장로교 소속의 선교사 헨리 하먼 스폴딩은 아내와 함께 개신교와 카톨릭의 차이를 분명히 명시하는 ‘개신교의 사다리’를 만들어 이에 맞섰다.
또 책에는 차트와 도표 제작에 독창적인 재능을 보인 유명인사들도 등장한다. 1850년대 플로런스 나이팅게일은 ‘장미’와 ‘박쥐날개’ 모양의 차트를 만들어 크림 전쟁 기간 동안 사망 원인의 변화상을 명쾌하게 보여줬다. 마크 트웨인은 역사적 사건을 잘 기억하기 위한 ‘기억 증진 장치’로서 연표를 이용해 연대기를 외우는 게임을 개발해 1885년 특허를 획득하기도 했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타임라인을 이용한 연대기적 자료 통합 방식은 21세기 웹 2.0과 오픈 소스 애플리케이션 분야에서도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각 시대별로 연표와 연표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울 뿐 아니라 300여장이 넘는 도판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떤 연표들은 하나의 시각 디자인 작품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기능을 뛰어넘어 아름다움을 뽐낸다. 연표에 대한 이야기 속에는 서양인들이 ‘시간’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묻어난다.
역자는 “시간의 흔적은 선(線)으로 나타나고 그 선들은 직진하고 순환하고 역행하고 엇갈리며 당대인들이 자신들의 현재와 과거, 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은밀한 귓속말로 일러준다”고 했다. 특히 정보를 메모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기록하는 데 관심이 많은 독자들에게는 더욱 매력적인 책이 될 것 같다. 김형규 옮김.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그 시대 지식·세계관 압축 ‘연표의 역사’
입력 2013-08-08 1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