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일 신작 장편 ‘매구 할매’ ‘백년을 살아도 내 생의 주인공은 나’ 고향 여인들 이야기

입력 2013-08-08 17:43


“한때 200여 가구에 1000명 넘는 사람이 살았던 고향 동네는 오래 전부터 여노인정과 남노인정이 따로 있었어요. 그렇게 컸던 동네에 현재 남은 주민은 200여 명이죠. 그 중 150여 명이 여성인데, 그 중에서도 80%가 70대에서 90대에 이르는 독거노인들이에요. 몇 해 전, 그 분들을 여노인정에서 한꺼번에 만난 적이 있어요. 제가 눈여겨보지 않은 사이에 할매가 된 고향 여인들이 이러는 거예요. ‘니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쓴담시롱. 내 이약 잔 써주라(내 이야기 좀 써주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내가 이들의 삶을 쓰지 않고 어디를 헤매고 다녔나 싶어 부끄러웠지요.”

신작 장편 ‘매구 할매’(문이당)를 낸 작가 송은일(49)의 말이다. 소설은 그의 말대로 몇 년 전 그가 고향인 전남 고흥의 노인정에 들렀을 때 이미 씌어지고 있었다. 주인공은 400년 묵은 집 ‘계성재’를 지키며 늙어가는 100살 매구 할매. 그는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할머니들의 전형이기도 하다. 평생을 한 자리에 붙박여 살아온 듯한 할머니들에게도 사연은 있었다. ‘매구 할매’ 역시 지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채 한 자리에서 나이 들어 현재에 이르렀지만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인 사람이다. ‘내 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테마의 소설엔 두 줄기 이야기가 흘러간다.

계성재 20대 손인 소설가 류은현이 소설을 쓰기 위해 400년 전부터 집안에 내려오는 ‘계성재가솔부’를 아버지로부터 넘겨받은 후 윗대 어른들의 행적을 복원한 과거 기록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은현의 대학 때 남자친구가 매구 할매의 삶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하려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은현과 재회하며 전개되는 현재의 기록이다. 여기서 ‘계성재가솔부’의 기록자가 그 집안 며느리인 종부들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한마디로 여인들의 기록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시점의 이야기 역시 그 집안의 딸인 류은현에 의해 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은 모계적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매구’는 천 년 묵은 여우가 변해서 된다는 전설의 짐승을 뜻하지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100살 넘긴 할머니가 굵직한 근현대사를 통과해 한 집안의 어른으로 생존해 있다고. 늙는다는 건 어쩌면 우리 삶의 축복일 수 있어요.” 송은일이 8일 전화통화에서 들려준 말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현존한다는 것은 그 의미를 헤아리기 힘들다. 작가는 그 의미를 찾고 싶어 요즘 보기 드문, 원고지 1400장에 이 길고도 짧은 이야기를 담아냈다. “예전엔 여자의 일생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쓰면서 그 무언가가 없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결국 우리 삶은 혼자 남겨진다는 것. 그 단순한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오더군요.”

송은일은 우리가 흔히 ‘한 백 살 살고 싶다’고 말하는 의미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두 이야기는 마지막 장면에서 현재 시점으로 합류한다. 송은일 특유의 필력이 느껴지는 지점인데, 그가 우리 문단 내에서 손꼽히는 여장(女將)인 것은 이런 문장 때문이다. “삽시간에 뜨거워졌다가 빠르게 냉각되는, 여운이라고는 없는 족속들. 냉각의 이유는 언제나 단순했다. 불안한 자신의 현실을 받쳐 줄 상대가 아니라는 것. 똑같은 불안에 시달리는 동족이라는 걸 알아채는 순간 서로에게서 물러나는 것이었다.”(94쪽)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