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에 붙여진 ‘이름’… 과연 적합한 것일까?
입력 2013-08-08 17:43
김언 네 번째 시집 ‘모두가 움직인다’ 출간
이름은 존재보다 선행할 수 없다. 이름이 있으려면 먼저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존재나 물질에게 붙여진 이름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한다면? 예컨대 존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인데, 그 존재에게 이름이 붙여질 경우 그 본질적인 사건은 이름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다.
김언(40·사진)의 네 번째 시집 ‘모두가 움직인다’(문학과지성사)는 이미 고착화되어 불리고 있는 존재들의 이름을 의심하며 ‘이름 붙이기란 이름 지우기나 마찬가지’라는 나름의 미학을 담고 있다. “여기서 만져지는 물질이란 모두 내가 만지기 위해/ 탄생한 물건들 이름들 형제들 그리고 하나같이 죽는다./ (중략)/ 이 물질의 이름은 부적합하다. 손톱은 손톱 때문에/ 나무는 나무 때문에 굴뚝은 굴뚝 때문에 모두/ 연기가 될 수 없다”(‘이 물질의 이름’ 부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이름 붙여진다. 예컨대 손톱이 손톱으로, 나무가 나무로, 굴뚝이 굴뚝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이름들은 모두에게 암암리에 ‘동의된 이름’에 불과하다. 그래서 김언은 이런 동의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김춘수 시인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꽃’)고 노래했다면 김언은 김춘수와는 상반되게 그 이름 자체를 의심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의심은 더욱 증폭되어 이름으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의 존재가 세상에서 배제되고 있다고 진술한다.
“너는 배제되고 있다/ 파란색과 파란색 사이에서/ 푸른색과 푸른색 사이에서/ (중략)/ 세상 모든 페인트 회사들이 뿌려놓은 이름과/ 이름 사이에서”(‘청색은 내부를 향해 빛난다’ 부분)
김언의 이러한 진술은 사물들에 붙여진 이름들을 의심하고 부정할 때, 비로소 사물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물질의 세계에서는 이름도 죽는다는 것인데, 이름에서 해방될 때 물질은 비로소 허위와도 같은 이름과 무관한 절대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다./ 우리는 구이고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변함없는 크기를 갖는다.”(‘기하학적인 삶’ 부분)
김언은 ‘뒤표지 글’에 “내가 나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을 모두 잊어버린 후에도 말할 것이 남아 있는 상태, 그 상태의 지속이 시를 쓰게 한다”고 썼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