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민수] 지도부로살아남기
입력 2013-08-07 17:29
2000년 12월 24일 한국 정당사(史)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희귀한 일이 벌어졌다. 새천년민주당 송석찬 의원은 “저는 지금 연어의 심정으로 당을 떠납니다”라는 말을 남긴 뒤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 유명한 ‘의원 꿔주기’다. 그해 4월 총선에서 17석을 얻은 자민련이 국회교섭단체(20석)가 되지 못해 DJP(김대중 대통령·김종필 총리)공동정권이 타격을 받게 되자, 민주당 지도부는 자당 의원 3명의 ‘임대’를 단행했다. 하지만 자민련 강창희 의원(현 국회의장)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JP는 그를 제명했고 DJ는 민주당 의원 1명을 추가로 보냈다.
국회의원에게 당적은 쉽게 옮길 수 없는 ‘호적’과 같다. 이리저리 몸을 굴렸다가는 두고두고 철새라는 오명이 따라다닌다. 13년 전 보스에 의해 호적을 팠던 4명도 평생 이 굴레를 써야만 했다.
강경파에 휘둘리는 여야 대표
요즘 새누리당과 민주당 지도부의 처지가 말이 아니다. 소수 강경파에 휘둘려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연일 쏟아진다. 아침에 결정한 지도부 방침이 오후 들어 뒤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당 대표가 꽁꽁 얼어붙은 정국을 녹여보겠다며 여야 대표회담 구상을 밝히기가 무섭게 하위 당직자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받아버린다. 야당 대표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 공개에 부정적이었지만, “자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특정 계파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만약 현 여야 지도부가 소속 의원들에게 당적을 옮기라는 ‘지시’를 한다면 분명 참극이 벌어질 게다.
어쩌다가 갑(甲) 중의 갑, 슈퍼 갑이라는 지도부는 이 지경까지 왔을까. 해법을 찾자면 우선 본인들이 처한 현재 상황을 냉철하게 짚어봐야 한다. 작금의 여야 수뇌들에게는 공천권과 ‘검은돈’이 없다. 예전 보스들은 이 둘을 갖고 의원과 당원들을 줄 세웠다. 정치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만한 당근은 없었던 셈이다. 여기에 여권 지도부에게는 사정당국과의 ‘긴밀한 끈’이 하나 더 존재했다. 소속 의원들의 온갖 비리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고 그들이 수사대상에 오를 때 당국과 조율이 가능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향식 공천제도가 날로 확산되는 형세다. 초선의원들 사이에서는 “지도부 뒤치다꺼리할 시간 있으면 지역구 골목을 한 바퀴 더 도는 게 남는 장사”라는 말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더 이상 공천권은 의원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무기가 되지 못한다는 얘기다. 돈도 없다. 선관위 보조금이나 영수증이 발부된 후원금 외에 검은 빛이 도는 금품에 손을 댔다가는 계파 결성은커녕 쇠고랑차기 십상이다.
2013년 대한민국 정치권에서 ‘지도부로 살아남기’는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이다. 밑에서는 치받고 밖에서는 당원과 지지자, 네티즌들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간혹 3김(金)식 정치를 그리워하는 인사들도 눈에 띄는데 단연코 그런 시대는 끝났다. “난 당원들이 직접 선출한 대표”라고 외쳐봐야 메아리도 없다.
의원·당원 설득하는 기술 필요
따라서 되돌아오지 않을 추억을 떠올리기보단 환경에 순응해야 한다.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유력 대권주자로 부상하는 경우 주변에 복종자(服從者)들이 모여들지만 이 또한 인기 빠지면 도루묵이다. 결국 새 리더십이 답이다. 끊임없이 의원·당원과 얘기하며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예전에 10분 만에 당론을 이끌어냈다면 이젠 10시간, 100시간이 필요하다는 각오가 절실하다. 그리고 룰을 하나 만들자. 뒷담(談)하지 않기다. 의견이 모아지기 전까지는 지도부를 대놓고 공격해도 되지만, 어렵사리 결론 나면 라디오 이런 데 나가서 딴말해선 안 된다. 국민들을 짜증나게 하는 정치인들의 대표적 추태이기 때문이다.
한민수 정치부장 ms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