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리스, 가정서 쫓겨난 아이들] ‘가출팸’ 생활 아이들 종일 떠돌다 밤 11시 첫 끼니
입력 2013-08-07 00:24
6일 오전 5시20분,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림역 인근의 패스트푸드점 2층 창가. 널브러져 자고 있는 세 아이 중 한 명의 얼굴이 낯익었다. 검은 민소매와 운동복 바지, 맨발에 슬리퍼. 초등학교 5학년 때 가출해 6∼7년 동안 집과 거리를 오갔다는 준수(이하 가명·18)였다. 옆에는 “난 가출한 게 아니라 3일째 외박 중”이라고 주장하는 지훈(16)과 긴 생머리의 여학생 하나가 테이블 위에 얼굴을 묻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거리를 헤매다 새벽 3시쯤 아지트인 햄버거집으로 ‘귀가’한 이들은 지금 휴식 중이다. 창 너머로는 신림의 밤이 저물고 아침이 오고 있었다.
◇밤 11시에 때우는 첫 끼니=준수를 처음 만난 건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던 지난달 28일 밤, 역시 신림역 패스트푸드점에서였다. 경기도 안산 청소년쉼터 ‘자유세대’ 소장 송정근 목사와 함께 ‘아웃리치(outreach)’에 나선 참이었다. 아웃리치는 쉼터에 오지 않는 가출 10대를 찾아나서는 활동이다. 지난해 조사를 보면 가출 청소년의 쉼터 이용률은 24% 안팎. 나머지를 만나자면 거리밖에 없었다.
돈 없는 10대가 모이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주문 안 해도 눈치가 덜 보이는 패스트푸드점과 빈 종이컵을 놓고 몇 시간을 버틸 수 있는 24시간 카페 같은 곳들이다. 푼돈이 생긴 날엔 한집 건너 하나씩 널린 노래방으로 몰려갔다. 가출 청소년의 메카로 불리는 신림역 부근은 아이들의 서식지였다. 그중 4번 출구의 패스트푸드점, 6·7번 출구에 몰려 있는 3∼4곳의 커피전문점, 인근 도림천변이 아이들의 거점 역할을 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갯빛 머리카락을 뽐내는 2층 창가의 10대 10여명을 보고 송 목사가 속삭였다. “염색한 거 보세요. 우리 애들이 틀림없어요.” 쉼터 소장인 송 목사가 다가가자 아이들은 긴장했다. 가출 실태조사를 하려 한다고 설명해도 풀리지 않던 아이들의 경계심은 햄버거와 문상(문화상품권), 두 마디에 눈 녹듯 사라졌다. 집 나온 아이들에게 어른은 두 종류였다. 밥을 사주는 어른과 그렇지 않은 어른. “아침에 빵 하나 먹은 게 전부”라는 아이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는 소녀까지 10명 넘는 아이들은 밤 11시에 버거세트 하나씩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햄버거 하나에 태도가 공손해지는 건 배고픈 아이들의 생존법이었을 것이다. 이틀을 굶었다는 한 아이는 제몫을 해치우고는 케첩 봉지들을 찢어 입안에 짜 넣었다.
◇가출팸의 서식지 신림역=아이들은 남자 10명, 여자 4명으로 구성된 일종의 ‘가출팸’(집을 나온 뒤 함께 모여 사는 10대 집단)이었다. 얼마 전까지 한 아이의 부모가 구해준 인근 고시텔에 모여 살다가 쫓겨난 뒤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근거지는 신림이지만 구성은 전국구에 가까웠다. 전주에서 상경한 지 50일 됐다는 연수(17), 한 달 전 부산 집을 나왔다는 정민(15)까지 출신 지역은 제각각이었다. 4∼5월부터 몰려다니기 시작한 아이들은 신림 일대에서는 유명했다.
인근 24시간 커피전문점에서 밤 근무를 한다는 20대 점원은 “새벽에 몰려와서 낮까지 소파와 테이블에 드러누워 자곤 한다. 영업 방해로 몇 차례 경찰에 신고도 했다”고 말했다.
한창 설문조사를 하던 중간 한 아이가 주황머리 소녀 수혜(16)의 머리통을 가차 없이 때렸다. 수혜는 느닷없는 구타에도 별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사연은 이틀 뒤인 지난달 30일 두 번째 만남에서야 들을 수 있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수혜는 얼마 전 소주병을 깨 손목을 그었다. 살짝 본 수혜의 왼쪽 손목에는 10여개의 붉은 상처가 울퉁불퉁하게 남아 있었다. 수혜의 자해는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사는 수혜의 행동을 가출팸은 구타로 응징한 것이다. 단짝이라는 승미(16)는 “수혜가 나 좀 때려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들끼리의 작은 사회. 그 속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느끼고, 말하고, 행동했다.
◇왜 신림역인가=신림역 주변은 하루 14만명의 유동인구가 움직이는 서울 서북부 최대 상권 중 하나다. 이곳에 유독 집 나온 아이들이 많은 이유를 송 목사는 ①원룸·고시원 ②도림천 ③저렴한 상권 3가지로 요약했다. 신림역 일대 가게들은 강남이나 신촌, 명동 등지에 비해 이용료가 싸다. 24시간 문을 여는 각종 업소와 찜질방, PC방, 노래방에 인력소개소가 신림역 사거리를 중심으로 반경 500m 안에 밀집해 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온갖 업소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셈이다. 불판 닦기 같은 아르바이트 거리는 순대골목이, 싼 주거지는 도림천을 따라 즐비한 한 달에 20만∼25만원짜리 고시텔이 제공한다. 특히 도림천변은 아이들이 눈총 받지 않고 놀 만한 외진 공간이 많다.
밤 12시를 향해가는 시간, 배를 채운 아이들은 돈을 들고 나타날 거라는 ‘가출 하지 않은’ 친구들을 기다렸다. 모여 있는 10여명 중 돈이 있는 사람은 한 명. 그것도 딱 1000원뿐이다. 돈 가진 아이들이 오면 그 1000원을 보태 노래방에 갈 계획이다. 노래방 다음엔 24시간 카페, 카페에서 쫓겨나면 패스트푸드점, 그도 마땅치 않으면 도림천변을 배회한다.
“쉼터에 가는 게 어때요?” 따로 앉은 소녀 둘에게 살짝 물었다. 아이들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쉼터 같은 데는 안 가요. 쉼터도, 어른들도 아무도 안 믿어요. 우리는.”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