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 20년] 빈틈 노린 ‘차명 비리’ 판쳐… 지하경제 양성화 걸림돌

입력 2013-08-06 17:51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긴급 명령으로 시행된 금융실명제가 오는 12일 20주년을 맞는다. 금융실명제 시행으로 금융거래 투명성은 어느 정도 높아졌다. 특히 허구의 인물을 내세워 금융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는 사라졌다. 하지만 차명계좌 관리에는 여전히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박근혜정부가 주요 국정과제로 추진해 나가고 있는 ‘지하경제 양성화’ 성공을 위해서도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허점 파고드는 차명계좌 범죄=우리 금융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금융실명제는 그동안 사회의 부패 고리를 끊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곧 금융실명제의 허점을 노리는 범죄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타인 명의의 계좌를 사용해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차명계좌 범죄가 그것이다.

민주당 민병두 의원은 2006년부터 올해 2분기까지 차명 계좌를 활용한 저축은행 비리 사건이 모두 2383건, 액수로는 6조7546억원에 달한다고 6일 밝혔다. 유형별로는 개별차주 신용공여 한도 초과 건이 1543건(4조2866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대주주 신용공여 위반이 351건(1조4476억원), 동일차주 신용공여 한도 초과가 489건(1조204억원) 등이었다. 즉 저축은행이 대주주 또는 동일인 등에게 대출해줄 수 있는 한도가 정해진 법을 차명계좌를 통해 교묘하게 피해갔다가 적발된 것이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가 본격화된 이후에도 1779건, 3조4533억원 규모의 비리가 차명계좌를 통해 버젓이 이뤄졌다. 이외에도 굵직한 정·관계 게이트가 터질 때마다 차명 계좌는 어김없이 그 존재를 드러냈다.

◇차명거래 금지가 지하경제 양성화 관건=지하경제 양성화의 선봉에 서 있는 국세청은 올 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차명 계좌 처벌 강화를 요청했다. 지하경제의 대부분이 차명 계좌를 통해 움직이는 만큼 이를 금지하면 막대한 세수 확보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세청은 이미 최고 10억원의 포상금을 지급하는 ‘차명계좌 신고포상금제’도 올 초부터 시행 중이다. 최근에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로부터 조세피난처를 통한 역외탈세 의혹이 폭로되면서 세계적으로 차명 거래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진 상태다. 국세청 관계자는 “정부 기관 간 금융거래 정보공유 확대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차명 거래를 금지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차명 거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민주당의 이종걸, 민병두 의원은 차명거래 전면 금지 규정을 담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법률’(금융실명제법) 개정안을 이미 발의한 상태다. 새누리당 박민식 의원과 무소속 안철수 의원 역시 관련 법안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민 의원은 차명거래의 원천 금지를 주장한다. 범죄형 차명계좌를 근절하되 자녀 명의 통장 등 이른바 ‘선의의 차명계좌’에 대해서는 예외를 허용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이 의원은 차명 거래 위반 시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규정을 발의했다. 반면 박 의원은 차명계좌 거래에 대해 과징금을 최대 30%까지 매기고 단계적으로 처벌하자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는 금융실명제법 개정안을 두고 격렬한 논란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