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앞두고 ‘양복명장’ 도전하는 78세 김진성 장인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다리미 잡은 손에는 힘이 넘쳤다. 쓱쓱 다린 뒤 재킷을 척 들어올리니 날아갈듯 맵시가 넘친다. 양쪽 포켓 위에 ‘체인지 포켓’까지 있는 디자인이 예사롭지 않다. 김진성(78)씨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8일 열리는 ‘제35차 세계주문 양복연맹총회’ 기념 국제패션쇼’에 선보일 재킷”이라고 소개했다.
이번 총회는 한국맞춤양복협회 주최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23개국에서 600여명의 맞춤 양복 전문가들이 참가해 6∼8일 펼쳐진다. 대회 기간 중 중소기업청 주최로 우리나라의 맞춤양복솜씨를 뽐낼 ‘양복명장경기대회’도 7∼8일 열린다. 35년 이상 양복을 지어 온 베테랑들이 참가한다.
손자 재롱이나 볼 나이지만 현장을 지키고 있는 김씨는 ‘양복명장 경기대회’에 도전장을 냈다. 지난 1일 아직도 단골손님들이 줄지어 찾는 인천 용동 ‘도성양복점’에서 이번 대회 참가자 중 최고령자인 그를 만났다.
최고의 양복 기술자를 뽑는 ‘명장’ 심사위원까지 지낸 원로인 그가 이 대회에 나선 이유는 뭘까? ‘외국 손님들 앞에서 우리 실력을 보여 달라’는 한국맞춤양복협회의 간곡한 청도 뿌리치기 어려웠지만 그보다는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우리나라는 세계기능올림픽 양복 부문에서 1967년 첫 금메달을 딴 뒤 83년까지 12연패를 한 실력입니다. 세계 최고의 솜씨지요.”
그는 우리나라가 12연패에 그친 것은 영국과 이탈리아 일본 등이 참가 신청을 안 해 양복 부문이 중단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대회는 참가 신청국이 5개국 이상이 되어야 개최한다는 규정이 있다는 것.
국내 최고의 ‘테일러 맨’으로 꼽히는 그는 정작 세계기능올림픽에는 참가하지도 못했다. 연령제한(당시 20세 이하)에 걸려서.
그가 맞춤양복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열아홉 살 때였다. 당시만 해도 그 나이면 벌써 일류 기술자가 되어 있을 나이였다. 늦깎이로 양복 짓는 일을 배우게 된 것은 6·25 전쟁 때문이었다. 황해도 웅진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이 나자 열여섯 살에 학도호국단으로 입대했다. 그가 군대 가 있는 동안 가족들은 납북됐고, 1·4 후퇴 때 단신으로 월남했다. 전라도 나주에서 남의집살이를 하던 그에게 인천에서 양복점을 하는 고향 사람이 도움의 손을 내밀었다. ‘기술을 배우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양복점에서 허드렛일을 시작했다. 나이 많은 견습공에게 누구도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깨 너머로 배웠어요. 제대로 배워도 5년 걸린다는데 나는 2년 만에 재킷을 만들었어요. 모두 놀랐지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있었던 그는 낮에 눈 동냥한 것을 밤 새워 만들어 보는 열성으로 두해 만에 양복 전문기술자가 됐다. 그의 솜씨가 알려지자 큰 양복점에서 스카우트했다.
양복 짓는 일만 열심히 한 건 아니다. 머슴살이를 할 때도, 견습공 시절에도 끼니를 거를지언정 배움에 대한 끈은 악착같이 붙들었다. 어렵사리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야간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했다.
“졸업을 1학기 앞두고 5·16이 났어요. 남자들에게 재건복을 입혔으니 양복점이 될 리가 있나요.”
양복점이 불황기에 접어들면서 그는 딴 우물을 팠다. 한국기계(현 대우중공업)에 입사해 7년을 다녔다. ‘자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월급을 모아 인천의 ‘명동’으로 불렸던 용동에 양복점을 냈다. 그때가 1969년, 서른네살 때였다. 녹슬지 않은 솜씨 덕분에 양복점은 번창했다. 세계기능올림픽대회에는 못나갔지만 1972년 전국기술경진대회에서 대상도 탔다.
“맞춤양복은 손님들의 개성과 취향을 맞춰 드려야 합니다. 물론 유행도 반영해야 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입었을 때 태가 나면서도 편해야 합니다.”
한때 인천에서 주먹깨나 쓴다는 이들 대부분이 그를 찾았다. 근육이 지나치게 발달해 재킷 입은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데 김씨의 양복은 맵시가 나면서도 편했던 것.
지금도 쉬지 않고 패션 관련 책을 보면서 유행경향을 파악하고 있다는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양복 짓는 일을 계속 할 계획이다. 그가 양복점을 접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몇 해 전부터는 한번에 8∼9벌씩 해가는 단골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에서 그는 69명의 후배들이 아니라 침침해진 눈과 굼떠진 손과 겨뤄야 할 터다. 하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스테인리스 가위 3개가 닳아 없어지고 4개째를 쓰면서 갈무리해둔 솜씨가 돋보기와 재바른 도우미가 되어 줄 것이므로.
인천=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
한땀 한땀 혼신의 바느질 세개째 닳아 없앤 가위와 돋보기가 나의 무기
입력 2013-08-06 17:21 수정 2013-08-06 1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