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너목들’처럼… ‘열혈 국선변호사’ 여기 있었네

입력 2013-08-05 01:04


서울남부지법 신민영 변호사, 할머니 남편살인미수 혐의 벗기고 20대 남성 강간범 누명 벗기고

지난 5월 15일 서울남부지법 법정 406호실. 남편을 살해하려 한 혐의로 기소된 70대 할머니는 국민참여재판에서 살인미수 혐의를 벗었다. 대신 형량이 약한 상해죄로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자칫 중형이 선고될 뻔한 사건에서 할머니를 도와준 건 국선변호사였다. 할머니는 “끝까지 나를 믿어 준 국선변호사가 있다”며 기자에게 신민영(35·연수원 41기) 변호사의 연락처를 건넸다. 최근 인기리에 막을 내린 SBS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열혈 변호사로 등장하는 차관우(윤상현) 변호사를 연상시켰다. 4일 서울 신정동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신 변호사는 “할머니가 처음 찾아왔을 때 ‘범죄사실을 인정하고 선처를 구하는 게 낫겠다’고 설득했다”고 털어놨다. 검찰 공소사실을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소사실에 따르면 할머니는 지난해 11월 손에 장갑을 끼고 철제 변압기로 안방에 누워 있는 치매 할아버지를 수차례 내리쳤다. 할아버지 머리에서 피가 흐르자 아들에게 전화해 “집에 강도가 들었다”고 했다. 경찰의 추궁에 할머니는 범죄 사실을 인정했다. 사건 기록만으로는 살인미수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정말 억울하다”고 거듭 호소했다. 신 변호사는 “그때 할머니를 믿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신씨는 사건 기록을 덮고 사건 현장인 할머니 자택을 찾았다. 집안 곳곳에는 장갑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는 평소 관절염 때문에 장갑을 끼고 생활해 왔고, 관절염 치료를 받은 병원기록도 있었다. 의도적으로 장갑을 찾아 낀 게 아니라는 얘기다.

살해 의도가 있었다면 칼이나 방망이 같은 도구였어야 하는데 평소 거의 사용하지 않는 변압기를 사용한 것도 이상했다. 우발적인 폭행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또 현장 사진에는 할아버지의 머리 앞부분에 피가 흥건했는데도 진료 기록에는 ‘머리 뒷부분 뇌출혈’이라고 적힌 점 등 여러 의문점도 분석해 재판부에 설명했다. 재판부는 “할머니에게 살해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며 살인미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신 변호사는 지난해 9월 강간범으로 몰린 20대 남성의 누명을 벗겨주기도 했다. 모텔 CCTV에는 피고인이 쫓아오는 여성을 때리고 도망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현장을 찾은 신 변호사는 여성의 주장이 거짓임을 확신했다. 여성은 “집에 가려고 택시에서 내렸는데 피고인이 모텔로 데려갔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택시에서 내린 곳과 여성의 집 사이엔 공사 현장이 가로막고 있어 걸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성은 “피고인이 밀어서 넘어지는 바람에 모텔 방 집기가 깨졌다”고 주장했지만 모텔 방 벽면에는 화장품이 흘러내린 자국이 있었다. “여성이 취해 화장품을 던지는 바람에 도망친 것”이라던 피고인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피고인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신 변호사는 2011년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서울남부지법 국선변호사에 지원했다. 그는 “형사사건은 추리 소설을 실시간으로 써내려가는 느낌”이라며 “형사사건을 많이 경험할 수 있어 국선변호사를 지원했다”고 했다.

신 변호사는 “일반적인 형사사건에서 변호사는 상대방이 미리 유리하게 장기말을 배치해 둔 ‘박포장기’를 두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며 “수사기관이 압수수색, 계좌추적, CCTV 확인 등 증거를 확보한 상태에서 ‘게임’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거대한 벽과 맞닥뜨린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