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수직과 수평의 통합

입력 2013-08-04 16:50


마태복음 18장 21∼35절

예수님의 ‘용서하지 않은 종의 비유’(18:23∼35)는 3막의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막(23∼27절)은 궁전에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 곧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진 종이 갚을 것을 요구받지만 갚을 길이 없어 임금에게 간청하자 임금이 모든 빚을 은혜로 탕감해 준 내용입니다.

2막(28∼30절)은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신하가 궁전을 나가면서 자기 빚의 100만분의 1인 100데나리온의 빚진 동료를 만났는데, 그가 간청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빚을 갚지 않는다며 무자비하게 감옥에 투옥시킨 내용입니다.

이어 마지막 3막(31∼35절)은 2막의 내용을 지켜본 다른 동료가 이 일을 임금에게 고하자 임금이 크게 노하여 1만 달란트 빚진 종을 다시 불러 그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히브리 문학에서 중심부분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는 교차대구법, 즉 A(1막) - B(2막) - A’(3막)의 형식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궁전에서 있었던 임금과 1만 달란트 빚진 종의 이야기(A)는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의 수직적인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 임금의 신하와 그에게 1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의 이야기(B)는 우리와 우리 동료(자연 피조물 포함)의 수평적인 면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오히려 A의 이야기는 B를 위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3막에서 임금이 1만 달란트 빚진 자를 다시 소환하여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투옥시킨 이야기(A’)는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 관계(A)가 ‘나와 너’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B)로 구현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인 관계(A)가 취소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과 우리의 수직적인 면과 우리와 이웃과의 수평적인 면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것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웃을 용서하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 믿음과 행위, 기독론과 제자론, 칭의와 성화, 나무와 열매, 직설법과 명령법이 각각 다른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하지 않은 종의 비유를 통해 이 모든 것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인 것이요, 통합적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반드시 사람 사이의 용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합당한 책임 없는 하나님의 값싼 은혜의 강조는 진정한 성경적 은혜가 아니며, 제자론이 없는 기독론의 강조는 가현설의 위험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가현설은 예수 그리스도가 물질적 육체와 결합할 수 없으며, 오로지 외관상 육체모양을 취하였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또한 행위 없는 믿음은 산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이며, 열매 없는 나무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 찍어 불에 던져질 나무이며, 성화 없는 칭의의 강조는 바리새인적 신 스콜라주의 신학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직 없는 수평이나, 수평 없는 수직만의 강조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성경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용서하지 않은 종의 비유에 나타난 예수님의 메시지를 바로 알고 적용시켜 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한국교회는 수직과 수평, 진보와 보수의 갈등과 이분법적인 사고를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갑종 목사 (백석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