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와 외교갈등 알면서… 러시아 왜 스노든 품었나

입력 2013-08-02 17:11 수정 2013-08-03 00:35


검은색 백팩을 멘 회색 셔츠 차림의 미국 중앙정보국(CIA) 전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30)이 1일 오후(현지시간) 승용차를 타고 러시아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모습이 현지 방송인 ‘라시야24’ 카메라에 찍혔다. 지난 6월 23일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한 뒤 미국의 여권 폐기로 40일간 오도 가도 못하고 환승구역에 발이 묶여 있던 그가 러시아의 망명 허가로 ‘자유의 몸’이 된 순간이었다. 동시에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미 백악관은 즉각 발끈했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스노든의 망명 허용은 법 집행과 관련한 양국 간 오랜 협력을 훼손했다”며 “공식·비공식 요청에도 러시아 정부가 이런 조치를 내린 것에 매우 실망한다”고 밝혔다고 워싱턴포스트(WP) 등이 보도했다. 이어 9월 러시아에서 개최되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관련,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참석 및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정상회의의 유용성을 검토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G20 정상회의 불참이나 정상회담 거부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미·러 간 외교관계 급랭이 불가피해졌다. 특히 미국의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백악관, 법무부, 연방수사국(FBI), 국무부는 스노든을 잡기 위해 가능한 모든 법적·정치적 수단을 동원했으나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러시아는 망명 허용도 모자라 스노든에게 ‘러시아의 페이스북’으로 불리는 IT업체 일자리까지 제안했다. 스노든은 러시아 정부에 “망명을 허용해줘 감사하다”고 밝혔다. 스노든 측 아나톨리 쿠체레나 변호사는 “스노든이 거주지를 정했다”며 “그는 이곳에서 그의 상황을 이해하는 많은 미국인 친구들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스노든은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미 정치권은 러시아를 성토하고 나섰다. 존 매케인(공화) 상원의원은 “강력한 대응이 있어야 한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린지 그레이엄(공화) 상원의원은 러시아의 결정을 “도발”이라고 했다. 미 상원은 지난달 스노든의 망명을 허용하는 국가를 제재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어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러시아 크렘린궁은 스노든의 망명 허가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특히 푸틴 대통령이 스노든에게 “러시아에 남기를 원한다면 미국 파트너들에게 해를 끼치는 데 초점을 맞춘 활동을 중단하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언급한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스노든의 망명을 허용할 경우 미국과 불편해질 것을 예상하지 않았을 리 없다. 때문에 푸틴 대통령이 미국과의 갈등 상황을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계산한 결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미국의 내부고발자를 껴안음으로써 푸틴 대통령에게 씌어진 자국 내에서의 비인도주의적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효과를 고려했을 것”이라며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스노든이 가진 정보의 활용가치도 눈여겨봤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WP는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뜻을 거스르며 러시아가 건재하다는 대외적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백민정 기자 min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