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박병권] 외교, 오묘한 미지의 세계
입력 2013-08-02 18:11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동유럽국가를 위성국으로 만들며 세력을 넓히던 옛 소련의 팽창주의 전략에 맞선 것이 봉쇄정책이다. 외교학의 1장 1절로 불릴 만큼 유용한 수단이다. 요약하자면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직접적인 무력 수단에 호소하기보다는 그 주위에 군사 기지망을 포위하면 시나브로 용해된다는 것이다. 미국 외교정책 전문가이자 역사학자인 조지 케넌(George F. Kennan)이 기초를 마련했다. 트루먼 독트린, 마셜플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출범 등으로 나타났다.
냉전의 설계자로 불리는 그는 주목할 만한 말도 많이 남겼다. 가령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미국 외교정책 책임자들에게 ‘정비사가 아니라 정원사’가 되라고 주문했다. 정원사처럼 한 나라의 땅에서 소일하며 그 흙을 뚫고 무엇이 나오는지 잘 살펴봐야 현명한 외교정책이 나온다고 강조한 것이다. 세계는 너무도 혼돈스러워 추상적인 원칙이나 규칙에 의해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이 공산주의냐 아니냐는 기계적인 사고방식으로 접근했던 베트남이 단적인 본보기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점령하면 베트남은 소련과 중국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 당시 미국의 판단이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공산주의자든 아니든,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의 지배를 혐오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인도차이나반도 전체가 공산화된다는 이른바 도미노 이론이 허구였음이 증명된 것이다. 요컨대 3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프랑스의 압박에 신음했던 베트남의 역사와 민족적 공산주의자 호치민의 실체에 대한 탐구가 부족했다.
미국은 조지 케넌의 말처럼 정책 대상 국가의 정원사가 되지 못해 갈수록 애를 먹고 있다. 몇 달 있으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시작한 지 만 12년이 되지만 해결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이기지 못하고 끝내는 또 다른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쿠데타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이집트도 마찬가지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이슬람근본주의자 정권이지만 선거로 출범한 민주정부를 도괴한 군부집단을 어떻게 할지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 국적의 골프선수들로만 구성된 팀과 나머지 유럽 여러 나라 선수로 구성된 팀이 경기를 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나라가 미국이다. 미군과 전 세계의 나머지 국가연합인 지구방위군이 싸워도 전자가 이길 것이란 전망이 많다. 핵을 보유하고 있어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은 없지만 아메리카의 파워란 가공 그 자체다.
안 되면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미국이야 그렇다 치고 우리 외교는 어떤 방향성을 갖고 나가야 할까. 지난한 과제다. 광복과 국치의 날이 공존하는 8월을 맞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다. 중심에는 당연히 일본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끊임없이 대륙을 향해 돌진했다. 넓은 중국과 만주벌판을 향해 날갯짓하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참여했다. 결과는 처참했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독일에서 발달한 정치지리학 이론에 따르면 대륙을 향한 일본의 몸부림은 숙명이다. 즉, 대륙국가는 끊임없이 바다를 찾아 해외로 진출하려고 시도하고 일본과 같은 해양국가는 반대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피해는 우리나라와 같은 반도국가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국가를 대륙국가, 해양국가, 반도국가로 지나치게 단순화한 약점은 있지만 한때 주목받았던 이론이었다.
여하튼 거대 강국인 러시아나 중국과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일본의 현재 상황이 결코 우연이 아닌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최근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이른바 평화 헌법을 개정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을 예사롭게 봐 넘길 일은 아니다. 치밀한 준비 끝에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속성을 가진 국가가 일본이다. 축구국가대표 대결에서 우리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일본은 자국의 국내리그를 통해 힘을 비축해 마침내 결실을 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일본 축구를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속살을 보면 간단치 않다. 우리는 일본을 잘 알지 못하면서 막연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봐야 한다. 일본의 국민작가로 통하는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마음’을 보면 그들의 내심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요즘 독자들에게는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대중성이 떨어지지만 일본 사람들 마음에는 소세키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사소설 성격이 강한 이 작품에는 주인공의 선생과 아버지가 메이지 일왕이 서거하자 따라 죽으려고 마음먹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가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이런 서술은 일본 근대문학에 의외로 많다. 일본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정원사를 키우는 것도 우리외교의 한 과제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