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의구] 나치의 길
입력 2013-08-01 18:40
“아소 부총리의 초법적 나치 개헌 미화는 역사인식과 인류 양심 거스르는 망언”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이 새로운 전쟁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나치 때문이었다. 1919년 1월 결성된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은 패전 후유증으로 신음하던 독일 국민들의 국수주의적 감성을 자극하며 세력을 확장해갔다. 28년 총선에서 12석에 불과했던 나치당은 30년 선거에서는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됐다. 32년 3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 패했지만 37%의 지지를 받았고, 4개월 뒤 총선에서는 제1당의 당수가 되는 데 성공했다.
독일은 베르사유조약으로 알사스, 프로이센 등을 내주고 130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물게 될 상황이었다. 29년 세계공황으로 경제가 어려워지고 실업이 증가하자 베르사유조약 파기와 군비증강을 주창한 나치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확산됐다.
히틀러가 독재 체제를 굳힌 최대의 변곡점은 전권위임법 입법이었다. 33년 1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불안한 정국 수습을 위해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 히틀러 내각은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했다. 2월 27일 의사당 화재 사건이 일어나 네덜란드계 공산당원이 붙잡히자 나치의 최대 정적인 공산당 의원들이 체포됐다. 사실상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치러진 3월 5일 총선에서 제1당을 유지한 나치는 3월 24일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을 활용해 초헌법적인 전권위임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비상사태 시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고 조약체결도 의회동의 없이 내각이 처리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 법이 통과되면서 독일의 첫 번째 민주주의 헌법인 바이마르 헌법은 사문화됐다.
전권을 위임받은 히틀러는 곧이어 공산당 의석을 박탈했고 나치당 이외 정당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4월 1일 유대인 배척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국민투표에 따라 총통의 자리에 오른 히틀러가 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5000만명이 희생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의 ‘나치 식 개헌’ 발언이 국제적으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 정계 2인자인 아소 부총리는 지난달 29일 “헌법 개정은 조용히 추진해야 한다”면서 “바이마르 헌법이 나치 헌법으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바뀌었다. 이 수법을 배우면 어떠냐”고 말했다. 발언의 진의를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일본 자민당 정부도 나치의 전권위임법 입법 과정처럼 선거 승리와 투표연합 등을 통해 의회 내에서 조용히 평화헌법을 개정하자는 취지로 보인다.
하지만 나치가 기존 헌법을 무력화한 과정에는 무리가 따랐다. 의회투표장 주변에는 나치 돌격대와 친위대가 둘러싸고 있어 쿠데타와 다름없었다. 공산당 의원 81명은 전원 체포되거나 도피 중이었고, 사민당 의원 26명도 출석할 수 없었다. 나치당은 재적 의원 3분의 2이상 출석과 출석 의원 3분의 2이상 찬성이라는 의결정족수를 채우기 어렵자 결석을 기권으로 간주해 출석수에 포함시켰다. 일본 자민당이 평화헌법 개정을 위해 이런 비정상적 길도 마다않겠다는 것이라면 매우 우려스러운 발상이다.
무엇보다 총리까지 지낸 일본 정계의 거물이 나치를 언급한 것 자체가 위험하다. 전 세계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은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역사적 책임의식이 있는 것인지 의심케 한다. 전 세계가 지탄하는 나치의 행각을 미화하는 듯한 발언은 인류의 양심과 역사를 거스르는 망동이다.
바이마르 체제에서 20년간 사민당 대표를 지냈던 오토 벨스는 전권위임법 의결 당시 바이마르 의회 마지막 자유발언에서 “전권위임법이 당신들에게 영원불멸의 이념을 없앨 수 있는 힘까지 주지는 못한다”고 외쳤다. 이어 그는 히틀러를 바라보며 “우리의 자유와 생명을 빼앗을 수 있지만, 우리의 명예를 빼앗을 수는 없다”고 일갈했다. 일본 정치권은 나치와 함께했던 과거를 미화할 게 아니라 과오를 직시하고 일본인의 명예를 두 번 다시 빼앗지 않도록 해야 한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