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술 없는 휴가

입력 2013-08-01 18:21


“언니야, 여름 지나서 와라. 지금 와 봤자 언니 좋아하는 바다가 없다.”

바다가 없다니, 해양도시 부산에 바다가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마음대로 국토지리 변경하지 말라는 나의 농담에 그는 대답 대신 사진 두 장을 보내주었다. 이른 아침 해운대 해수욕장의 모래사장. 쓰레기장이 따로 없었다. 먹다버린 과일이며 과자봉지, 찌그러진 맥주 캔과 음료수 병들. 심지어 깨진 소주병 조각들이 모래사장 곳곳에 찌를 듯한 기세로 박혀 있었다. 하얀 파도에 달라붙어 바다로 쓸려 들어가는 검정색 비닐봉투를 보니 속상함 반, 한심함 반이 뒤섞여 한숨으로 흘러나왔다. 밤새 부어라 마셔라, 흥청망청 술판을 벌여놓고 뱀 허물 벗듯 자기 몸 하나 달랑 챙겨서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갈지자걸음이 눈에 선했다.

“그러네. 바다가 안 보이네. 가을에 갈게. 바다 보러.” 씁쓸한 기분으로 대화창을 닫고 나니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었다. 휴대전화의 카메라 앨범에서 지난봄에 찍은 강릉 앞바다의 동영상을 찾아 열어보았다. 날아갈 것 같은 바람 소리와 모래사장을 파고드는 파도소리가 시원하다. 해질녘의 바다. 짙푸른 동해바다와 마주 선 서쪽 하늘이 자줏빛으로 물들어 가고,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가는 백사장에 가만히 앉아 ‘휴식’이라는 말을 떠올렸었다. 파랗게 하얗게 빛으로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그저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귀를 씻고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가슴 속까지 깨끗이 비워낸 시간. 그리고 그 빈자리에 생생한 자연의 기운을 가득 채울 수 있었던 그곳, 나를 쉬게 해준 그날의 바다. 그래, 이것이 진짜 바다지 싶다.

이 좋은 바다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술에 취해 망가뜨리다니 너무 속상했다. 한잔 두잔 술독에 빠져 폭주하며 바다를 더럽히는 휴가, 독 오른 술기운으로 타인의 휴식을 방해하고 자신도 지쳐 쓰러지는 그런 휴가는 그만 사라졌으면 좋겠다. 굳이 대자연이 허락한 쉼터에서까지 술을 찾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늘어지는 장맛비도 그치고 이제 본격적인 바캉스 시즌이다. 바캉스(vacance)란 휴양, 방학, 공백, 부재 즉 ‘쉬는 것, 빈 것’을 뜻한다. 올여름, 무거운 일상을 내려놓고 쉬러가는 김에 술도 잠시 쉬어보면 어떨까. 그리고 깨끗한 바다가 주는 오감만족의 시간, 채움의 휴가를 즐겨보자. 술 없는 여름바다가 모두에게 진정한 휴식과 건강한 추억을 선물해줄 것이다.

김희성(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