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여름날, 낯선 자아가 들려준 이야기… 김이듬 시집 ‘베를린, 달렘의 노래’
입력 2013-08-01 17:26
달렘도르프는 독일 베를린에 있는 작은 동네이다. 짚을 얹어 만든 달렘도르프 역사(驛舍) 뒤편에 서 있는 두 개의 장승을 지나면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과 건물이 나온다. 김이듬(44) 시인은 그 건물의 가장 높은 곳, 작은 다락방 연구실에서 2012년 봄과 여름을 났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하는 레지던스 작가였던 그는 낯선 달렘도르프에서 충동과 격정, 그리고 방랑의 나날들을 보내며 이방의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낯선 것은 그 자신이었다.
“코앞에 안내판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발견된 지점이라 씌어있었다/ 로자는 총살당해 운하에 던져진 후 그 시신으로 이곳까지 떠내려왔나보다/ 나는 한때 그녀를 흠모했으나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의 첫 산책은 거기까지였다/ 지금도 나는 계속 떠내려간다 둥둥/ 가끔은 틈에 낀 궁둥이를 빼느라 식겁하며”(‘그리운 로자’ 부분)
멀리 떠나온 낯선 풍경 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반추하며 마주보는 것은 존재의 캄캄한 심연일 것이다. 김이듬의 신작 시집 ‘베를린, 달렘의 노래’(서정시학)는 절반은 풍경의 낯섦으로, 나머지 절반은 그 자신의 낯섦으로 채워진 ‘베를린 리포트’에 해당한다.
140일 남짓한 체류기간 동안 그가 쓴 시는 67편. 이틀에 한 편 꼴로 쓴 셈인데, 과연 시로 쓰는 일기가 가당키나 한가, 하고 시집을 펼쳐보면 거개의 시들이 첫 줄은 스스로에게 부과한 의무로서의 일기였다가 마지막 행에 이르러 시로 빠져나가는 문장의 변주를 보여준다. 그러자니 김이듬의 몸은 풍경과 존재의 낯섦 사이에 낀 악기가 돼야만 했을 것이다.
“파트너 없는 이는 글자 쓴 종이를 벽 위에 붙인다/ 제 이름 나이 키 춤의 수준/ 여자는 분홍색 종이에 남자는 하늘색 종이에/ 어떤 이는 흰 종이에/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한 그 사람과/ 나는 한 시간 춤을 추었다”(‘춤추는 숲’ 부분)는 옛 맥주 공장을 개조한 ‘살사 댄스 팩토리’에서의 체험을 담고 있다. 하지만 김이듬은 그 체험을 “내 발자국을 따라 흔들리는 숲/ 검은 숲엔 가지 않았다”라는 마지막 연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자칫 일기가 될 뻔한 문장을 시로 격상시키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유리컵에 물이 석회가 되어 있어요 자고 일어나면 전신이 뻣뻣해요 (중략)// 자고 일어나면 어제가 되어 있고 굳은 엄지손가락 택시가 서죠 문득 당도한 곳 도동 사거리 죽은 엄마의 치마 속 전원을 뽑은 텔레비전처럼 깜깜해요”(‘백 일 동안’ 부분)는 석회질 많은 독일 수돗물이 촉발한 시이다. 그 물을 마시던 시인은 자신의 기억 속에 굳어있는 엄마를 끄집어내 되새김질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우리는 결국 어디에 살아도 언제나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카페 루이제에서 자두나무가 있는 정원까지 오는 동안/ 혼자 흐릿하게 떨리는 게 순수한 사랑이라고/ 나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시시각각 자두가 붉어지고 멀어지고/ 노을 때문에 가슴이 아픈 거다// 최고의 선은 각자의 세계를 향해 가는 것/ 그러나 가끔 이상하게/ 멈춘 채 돌아보게 된다”(‘다소 이상한 사랑’ 부분)
때는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김이듬이 베를린에서 그랬듯, 휴가지의 풍경 속에 꿈틀거리는 자의식을 이식해 보면 어떨까. 혹시 한여름 밤의 꿈에서나마 잃어버린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될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