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소재 웹툰 ‘미생’ 작가 윤태호 “두 집의 ‘완생’ 꿈꾸는 ‘乙’의 애환 그렸지요”
입력 2013-08-01 17:33 수정 2013-08-01 22:04
웹툰 ‘미생’ 92수(手)에는 브람스의 교향곡 3번 F장조 3악장이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시 ‘취하라’도 등장한다. “취하라/ 항상 취해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후략).”
지난해 12월 28일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 ‘미생 92수’에는 주인공 장그래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삶을 회상하는 일종의 번외편이 담겼다. 독자들의 댓글이 쏟아졌다. 그들은 ‘눈물’ ‘울컥함’ ‘먹먹함’을 말했다. 작가도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로 92수를 꼽았다. 지난해 많은 것을 이뤘다고 생각했지만 공허함이 같이 왔다.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며 92수를 그렸다고 했다.
지난해 1월부터 지금까지 1년 반 동안 대한민국 직장인들을 위로하고 공감하게 했던 미생 시즌1이 7월 19일 끝났다. ‘미생(未生)’은 두 집을 만들어야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인 ‘완생(完生)’이 되는 바둑판에서 ‘한 집만 있어’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작품은 프로기사 입단에 실패한 청년 장그래가 대기업 종합상사에 일하면서 경험한 에피소드를 바둑판 위에 은유적으로 담았다.
31일 경기도 분당의 작업실에서 만난 ‘미생’의 윤태호(44) 작가는 “바쁜 스케줄 덕분에 아직 미생이 끝난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운을 뗐다. 광주 출신의 윤 작가는 1988년 만화가 허영만 조운학 문하로 만화계에 입문해 93년 ‘비상착륙’으로 데뷔, 그간 ‘로망스’ ‘이끼’ 등을 펴냈으며 2010년 대한민국 콘텐츠 어워드 만화부분 대통령상 등을 받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만화가다.
-‘미생’은 직장인들에게 많은 공감을 샀다. 연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독자의 반응이 있다면.
“장그래처럼 실제로 바둑 프로 입단을 꿈꾸다 실패한 사람들의 이메일과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 장그래가 잘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장그래가 잘 돼야 내 인생도 잘 될 것 같다면서. 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분들로부터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작품을 통해 확인하고 싶다’는 내용의 메일을 많이 받았다. 그때 참 뭉클했다.”
-다음 시즌을 예고했다.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을(乙) 입장의 이야기를 할 거라는 개요는 정했다. 장그래가 사원에서 대리를 달게 되지 않을까 싶다. 취재의 어려움이 있다. 시즌1에 등장했던 대기업들은 특정한 업무 지침이 있는 반면 개인회사들은 각자 융통하는 방법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업무 성격상 비밀도 많을 것 같다. 공정하게 그들의 삶을 풀이해줄 사람을 찾아야 할 것 같다.”
-현재 네이트 웹툰 ‘인천상륙작전’을 연재 중이다. 어떤 방식으로 내용을 이끌어 가고 있고 반응은 어떤가(‘인천상륙작전’은 1945년 해방 이후의 혼란 시기를 소년의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6·25전쟁의 상처 등 한국현대사의 아픔이 담겨 있다).
“작품을 구상했던 4년 전부터 책을 읽고 주로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내용을 채워가고 있다. 책이나 소설에서 당시 생활 소품을 인용한 것을 찾고 상상한다. 역사물이다 보니 좌우 논쟁이 뜨겁다. 무서워서 댓글을 못 볼 정도다. 개인적 생각으론 창작자가 교과서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내 견해를 밝히는 것이고 그 견해에 어떤 근거가 동원됐는지 설명하면 된다. 문제는 지금 내용 진행이 너무 더뎌서 큰일이다.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까지 가야 하는데 지금 해방 이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웃음).”
-‘미생’이 너무 잘 돼서 부담을 느끼지는 않나.
“그동안 ‘잘 안 됐을 때의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괜찮다. ‘미생’은 너무 소중한 작품이지만 나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부담은 없다. 이름이 알려져 좀 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 점은 좋다. 그래서 더 잘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 신작 들어갈 때 여러 제안도 받았지만 원래 나처럼 소박하게 만드는 것이 맞는 거 같아 사양했다.”
-작품의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나.
“평소 아무 때나 머리 속에 남는 생각들을 휴대전화나 노트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땐 메모가 다 시원찮아 보인다. 기세가 좋거나 작가가 기운이 좋은 상태에 있으면 단어 하나로도 이야기가 되면서 상상력이 돈다. 내가 어떤 컨디션에서 이 메모를 보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 같다. 20대 때부터 일기를 쓰려고 했었고 개인적 느낌을 기록하려는 습관이 있다. 주로 후회스럽거나 반성하는 지점에서 나타나는 생각들을 문장으로 정리한다.”
-꿈이 무엇인가.
“고유한 나만의 것을 갖길 원한다. 누군가에게 대체되지 않는 작가가 되고 싶다. 나만의 어법과 문체를 가진 작가가 되고 싶다. 언젠가는 독자들이 내 문체에 익숙해질 텐데 그때 나는 문체를 더 넓게 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더 깊게 갈 것인가 그런 것들을 고민하고 있다.”
김미나 기자 min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