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 안 가니 팀장은 못 가고… 비상경영 기업 직원들 ‘휴가 속앓이’
입력 2013-07-31 18:16 수정 2013-07-31 22:55
CJ그룹의 한 임원은 올 여름 모처럼 가족과 해외여행을 갈 계획이었다. 이미 지난해 겨울 유럽 여행 예약을 마쳤다. 하지만 올 초부터 기업을 둘러싸고 하나둘 안 좋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지난 5월 검찰이 그룹 본사 등을 압수수색하고 지난달 이재현 회장이 구속 수감되기에 이르렀다. 수시로 현안을 챙겨야 하는 입장인데 일주일 넘게 자리를 비우는 건 무리라는 생각에 A씨는 결국 여행을 취소했다.
A씨는 31일 “회사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면서 “가족들이 몇 년 만의 해외여행에 잔뜩 들떠 있었는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룹 총수가 구속 수감 중이거나 재판이 진행되고 있어 ‘비상’ 상황인 기업의 임직원들이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터질지 몰라 상시 대기해야 하는 임원들은 올해 여름휴가를 언제 갈지, 갈 수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황이다.
SK그룹 계열사에 근무하는 한 부장은 당초 8월 초 여름휴가 계획을 잡아놨다가 잠정 취소했다. 최태원 회장에 대한 공판이 계속 이어지자 담당 임원이 휴가를 보류했고 그 아래 팀장이 또 보류하면서 팀 전체 계획이 꼬여버린 것이다. 특히 지난 29일 열린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검찰이 1심의 징역 4년보다 높은 6년을 선고해 그룹 내부의 긴장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결심공판이 끝나면 선고공판 전에 미뤄뒀던 휴가를 간다는 계획이었으나 그마저도 힘들게 됐다.
SK그룹 관계자는 “대다수 직원들은 여름휴가를 계획대로 떠나고 있지만 오는 9일 열리는 선고공판 때까지 대외 업무 등 특정 부서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자리를 비우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다”며 “오래 근무한 임원들은 회사에 대한 애착이나 충성심이 남달라 의리를 지키는 차원에서라도 휴가를 자제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지난해 8월 김승연 회장이 구속되면서 오너 공백이 장기화되고 있는 한화그룹 관계자는 “경영기획실 임원들은 휴가를 가는 게 조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라며 “그 외 부서나 계열사는 휴가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 사정과는 무관하게 ‘일 중독자’인 상사 때문에 휴가 이야기는 입 밖에도 못 내고 눈치만 보고 있는 직장인들도 있다. 건설회사에 다니는 이모(34)씨는 “요즘은 ‘잘 쉬는 게 경쟁력’이라며 다들 휴가를 독려하는 분위기인데 우리 팀장은 ‘시원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게 휴가’라고 쉴 생각을 안 한다”며 “함께 일하는 직원도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