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⑤ 원산·평양 대부흥 운동
입력 2013-07-31 17:07
회개→부흥→영적갱신… 한국사회 윤리의식 크게 끌어 올렸다
1907년 1월 14일, 평양 장대현교회. 같은 달 2일 시작된 신년부흥 사경회가 13일째를 맞았다. 황해도와 평안도 등 각지에서 모여든 1500여 성도가 통성기도를 드린 뒤 길선주 목사가 강단에 올랐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는 1년 전 죽은 친구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돈을 훔쳤습니다.” 길 목사는 1년 전 죽음을 앞둔 친구로부터 셈을 할 줄 모르는 아내를 위해 재산을 대신 정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100달러 정도의 돈을 훔쳤다고 고백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날 저녁 600여명이 새벽 2시까지 남아 회개 기도를 이어갔고 20여명이 자신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부흥으로 일컬어지는 1907년 평양대부흥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해 6월까지 평양 지역에서만 3만명이 회심했다. 길 목사는 1908년 압록강 순회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평양의 뜨거운 감격을 전국 교회와 나눌 수 있는 전도운동을 구상했다. 1909년 장로교와 감리교는 백만인 구령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서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며 결신 카드에 이름을 적어낸 사람은 1만3000명이었다. 그해 9월 서울의 감리교회에서만 3000명이 세례를 받았다.
평양대부흥의 도화선은 원산부흥운동이었다. 로버트 하디(Robert Hardie)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으로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1890년 9월 한국에 도착했다. 부산, 원산에서 의료와 전도활동을 펼쳤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원산 집회에 강사로 참석해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백인이라는 인종적 우월감, 의사라는 교만함, 성령 충만하지 못함으로 아무런 사역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며 회개했다.
한국기독교사연구소장인 총신대 박용규 교수는 “당시 한국 성도들은 하디의 회개를 통해 처음으로 죄의 확신과 회개가 실제 경험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하디의 회개 직후 양반 출신인 진천수라는 청년이 회중 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는 “나는 병든 아내를 미워했고,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며 “아내가 병들어 죽은 후에는 이를 수습하느라 친구와 명절을 함께 보낼 수 없어 아내를 저주했다”고 죄를 고백했다. 진실한 죄의 고백은 큰 울림을 남겼다. 1904년 1월 원산에서 열린 교파별 연합기도회, 1906년 8월 평양선교사 사경회 등 곳곳에서 회개가 잇따랐다.
원산·평양 부흥운동을 통한 죄의식의 각성과 실질적 회개는 일상생활에서도 큰 변화를 낳았다. 부흥은 개개인의 영적 갱신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윤리 및 인권의식 제고와 사회개혁으로 이어졌다. 1907년 평양대부흥 전후로 학교 설립이 급증해 1909년까지 전국에 950여개의 기독교 학교가 세워졌다. 한국교회는 당시 심각한 사회문제였던 음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전국적인 금주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술을 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하던 여성들의 인권과 지위 향상에도 나섰다. 선교사들은 특히 건강한 가정을 파괴하는 축첩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일부일처제를 지켜야 한다’고 설득했다. 당시 여성의 지위는 남성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에 불과했고, 어떠한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남성들은 여러 명의 첩을 두는 것이 허용됐을 뿐 아니라 이를 부와 권력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선교사들은 첩을 데리고 살거나 다른 여자와 함께 지내는 것을 정욕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하나님을 바로 믿으라고 권면했다.
남성들에게는 정결을 회복하고 가정을 사랑하도록 교육했다. 당시 조선사회에는 조혼 풍습으로 인해 강제혼, 거래혼 등이 빈번했고 여성은 교육기회와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했다. 한국교회는 이를 방지하고자 강제혼 금지, 남녀의 교육기회 평등, 조혼 금지 등을 주장했다.
북감리교 선교사 해리스(M C Harris)는 1908년 볼티모어에서 열린 북감리교 총회에서 “부흥운동의 여파로 수천명이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면서 많은 술꾼들이 술을 과감히 끊고 도박꾼, 오입쟁이 등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됐다”고 보고했다. 고신대 이상규 교수는 “1903년 하디 선교사로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은 한국교회를 윤리적으로 한 차원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자문해주신 분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박용규 총신대 신대원 교수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 △이상규 고신대 부총장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