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성경이 나라를 흥왕케…” 일제때 복음이 희망이었다
입력 2013-07-31 17:08
을사늑약과 영적각성운동
1905년 대한제국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일본은 5만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 친일파 대신들을 매수하고 협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통감정치를 실시했다. 전국은 국권 상실에 따른 비통함에 잠겼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그 가운데 영적 각성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을 감지했다.
을사늑약을 전후해 투옥돼 있던 민족 지도자들에게 복음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이승만 박사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동료 죄수들에게 “예수교가 대한제국 장래의 기초”라고 역설했다. 그는 당시 신학월보에 쓴 사설에서 “예수교로 변화시키는 법이 아니면 독립은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신학월보는 1900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신학 잡지다. 독립운동가 이창실 목사도 장로교 신문인 그리스도신문에 1906년 1월 25일 사설을 싣고 “성경이 나라를 흥왕케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이 시기에 전국 조직을 가동해 일제에 항거하는 애국운동을 펼쳤고, 일제의 만행을 외국인 선교사들을 통해 세계에 고발했다. 총신대 박용규 교수는 “이런 배경에는 영적 대부흥운동, 대각성운동이 있었다”며 “기독교 신앙은 민족의 독립심과 주권의식을 고취시켰고,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다는 절망은 민족의 신앙적 성숙으로 승화됐다”고 말했다.
선교사들은 1905년 9월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으로 장감연합공회를 결성하고, 1906년 음력설을 기해 전국 주요 도시에서 부흥회를 개최했다. 평양주재 선교사들은 원산부흥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한 하디 선교사를 초청해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평양선교사 사경회’를 개최했다. 하디 선교사는 자신의 죄를 회개했을 때 성령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고백했다. 이 무렵 존스턴(H A Johnston) 박사는 장대현교회 주일설교에서 직접 목격한 영국 웨일스 부흥운동을 전하면서 “누가 조선의 교회를 부흥시킬 성령의 은혜를 받겠느냐”고 질문했다. 당시 장로로서 신학생이었던 길선주 목사가 지체하지 않고 손을 들고 일어났다. 존스턴 박사는 장차 조선에 큰 부흥이 임할 것을 예언하면서 축복기도를 했다. 길 목사는 부흥사로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사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