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만나는 ‘제주도표 올레길’

입력 2013-07-31 17:37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20분 정도 날아가면 도착하는 일본 나가사키현에는 뜻밖에 제주도식 ‘올레길’이 있다. 제주올레 브랜드를 수입해 만들어진 규슈올레의 히라도코스가 그것.

맑은 날이면 멀리 대마도(쓰시마)까지 내다볼 수 있는 바다와 억새 가득한 풀밭이 한눈에 들어오는 30㏊ 넓이의 가와치토오게 초원, 일본에 가톨릭을 처음 전파한 자비엘 신부를 기념해 만들어진 자비엘 기념성당, 전근대의 골목길이 그러했을 법한 분위기를 풍기는 길을 따라 걷다가 나타나는 ‘교회와 절이 동시에 보이는 지점’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다. 코스가 끝나는 지점에선 족욕을 할 수 있는 온천이 나타난다.

제주올레에서 그러하듯 규슈올레에서도 리본을 묶어 코스의 표식으로 삼고, ‘올레’라는 명칭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한국인 여행객의 반가움을 더한다. 나가사키현의 여러 섬을 둘러보고 싶다면 사세보 구주쿠시마의 사이카이 국립공원을 한 시간 정도 둘러보는 유람선을 타면 된다.

고즈넉한 풍경에 정신을 뺏기다 보면 맑은 공기나 아름다운 경관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도쿄나 오사카와 같은 정치 중심지는 아니었을지라도, 나가사키의 옛 히라도번(藩)은 오랫동안 일본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도시로 번영했던 역사를 가진 유명한 곳이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엔 네덜란드와도 교역하는 국제무역항으로 이름을 날린 바 있다.

국제무역항 나가사키의 옛 흔적을 마음으로나마 더듬어보고 싶은 여행객에겐 히라도성에 올라가 보는 일정을 추천한다. 성의 겉모습은 일본 곳곳에 남아 있는 영주들의 다른 성과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성에서 히라도시(市)를 내려다보면 외부를 향해 트인 이곳의 지형과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시대의 네덜란드 상관을 복원한 건물이나 옛 영주의 별장도 바라볼 수 있다. 이곳 주민 정서와 현대의 역사까지 체험하려면 나가사키 평화공원과 원폭박물관에 가보면 된다.

사세보에는 ‘네덜란드 마을’로 알려진 리조트 공원 하우스텐보스가 있다. 네덜란드의 거리와 건물, 왕궁을 그대로 재현한 뒤 식당과 영화관, 소규모 놀이시설과 숙박시설을 구비해 놓은 관광지다. 용인에버랜드식의 어린이를 위한 테마파크인가 했더니 웬걸, 유럽의 어느 깔끔한 마을이 정말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사실감으로 가득 차 있다. 152㏊에 이르는 하우스텐보스 전체를 감싸는 네덜란드식 운하는 또 다른 볼거리다. 밀물 때 수문을 열어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관리된다. 이곳 전체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데는 2박3일가량이 소요된다고. 면적은 모나코 왕국 전체의 면적과 맞먹는다고 한다.

그러나 흠 잡을 데 없는 유럽식 외양보다 더 흥미로운 건 일본이 유럽을 소비하는 방식이다. 귀족의 대저택을 연상케 하는 웅장한 호텔과 유럽 도시 교외의 주택을 그대로 본뜬 별장들, 느긋하게 돌아가는 풍차에 계절에 따라 달리 열리는 꽃 축제까지. 하우스텐보스는 완벽한 네덜란드 마을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일본식 콘텐츠가 곳곳에 숨어 있어 웃음을 자아낸다.

드넓은 하우스텐보스 안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장소는 풍차 앞이나 궁전 같은 호텔도 아니고 애니메이션 ‘원피스’에 등장하는 선박 ‘사우전드써니’호를 재현해놓은 배 안이다. 네덜란드 왕궁을 본떠 만든 미술관에도 일본 애니메이션 관련 전시가 수시로 열리고 있다. 이외에 나가사키항 야경과 ‘일본 3대 차이나타운’ 중 하나로 꼽히는 나가사키 차이나타운 등도 볼 만하다.

음식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나가사키짬뽕과 카스텔라, 그리고 ‘사세보버거’가 유명하다. 사세보버거는 기존 햄버거와는 달리 주문 후 만들어지는 슬로푸드라는 점이 강조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건 식객을 압도할 만한 햄버거 크기다. 아직은 일본 내 다른 지방에서 구입하기는 어렵다.

온도와 습도가 높아 여름보다는 가을·겨울 시즌 여행이 적합하다. 하우스텐보스 내 호텔이나 빌라 혹은 온천이 있는 료칸에서의 숙박도 좋다. 저비용항공사인 진에어(www.jinair.com)는 인천공항에서 나가사키까지 매주 3회 직항편을 왕복운항한다.

나가사키(일본)=글·사진 양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