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남북대화 산증인… 이성원 통일부 과장

입력 2013-07-30 17:18 수정 2013-07-30 17:25


“北도 사람 사는 곳 역지사지 마음으로 먼저 손 내밀어야”

프로필

△1953년 강원도 고성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연세대 행정대학원 △미국 UC버클리대 객원연구원 △사회문화교류국 문화교류과장 △개성공단사업지원단 공단운영지원과장 △납북피해자지원단 심사과장 △남북출입사무소 경의선운영과장 △하나원 분원장

통일부에서 이성원(60) 과장만큼 북측 인사를 자주 만난 공무원도 없다. 대북 분야에서 이론가는 아닐지 몰라도 자타가 공인하는 마당발이다. 하지만 현재 그는 보직이 없다. 올해 말 정년을 앞두고 공로연수 중이기 때문이다. 그는 북측 인사들과 각종 남북 현안을 논의하면서 북한 실상을 누구보다 많이 경험했다고 자부한다. 그가 경험담을 담아 ‘그래도 우린 다시 만나야 한다’(꿈결)는 책을 펴냈다. 이 과장은 “평화통일이라는 집을 지을 때 우리 모두 벽돌 한 장 쌓는다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 25일 국민일보 회의실에서 그를 만나 남북 교류와 통일에 대한 관점 등을 들어봤다.

만난 사람=염성덕 논설위원

-북측 인사들과 많이 접촉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남북과 해외에서 100차례 정도 행사나 모임을 가졌다. 행사나 모임이 짧으면 사나흘, 길면 일주일쯤 걸리니까 접촉 횟수는 수없이 많다고 보면 된다.”

-개성공단이 폐쇄 위기로 몰리고 있다. 공단 폐쇄를 막을 방법이 있는가.

“개성공단과 관련해 제1차 남북협상 때부터 평양을 방문했고, 개성공단사업지원단 공단운영지원과장으로 1년 가까이 일한 적이 있다. 남북의 공단사업 관계자들과 함께 중국 공단도 시찰했다. 그래서 그들의 속내를 조금은 알 수 있다. 개성공단이 폐쇄되면 남북 모두 경제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향후 남북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북한에 원칙과 틀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생각은 욕심이라고 본다. 지난 13년간 접촉 경험으로 볼 때 북한도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 인내하면서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

-북한 핵 개발이 지역 안정을 해치고 있다. 북한이 핵 개발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도 핵개발이 한반도 안정과 평화통일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들로부터 수없이 들은 이야기다. 하지만 핵 포기는 권력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것을 보면서 저들은 더욱 핵에 집착하게 됐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게 하려면.

“핵이 없어도 정권이 안전하다는 믿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결국 남북, 북·미 간의 신뢰 문제가 아닌가 싶다.”

-역대 정권의 대북 정책을 평가한다면.

“질문에 대답할 입장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전임 이명박정권은 너무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헌법에 명시돼 있다. 그런 나라의 지도자가 철학도 없이 내 말 잘 들으면 떡을 주겠다는 자세로 대북 정책을 추진하고, 전임자들의 노력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자신만 옳다는 식으로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조국통일 문제를 다루는 통일부 조직을 없애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축소시키면서 통일부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려 놓은 점은 통일부 직원 입장에선 정말 못마땅하다. 당시 과장 보직 15개가 없어졌다.”

-박근혜정부의 대북 정책은 어떤가.

“조심스럽다. 하나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상대방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게도 문제가 있다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비로소 신뢰가 생긴다.”

-만난 이산가족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를 꼽는다면.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없이 많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2002년 초가을 금강산 온정각에서였다. 할머니와 두 딸이 북으로 간 남편이자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위도 동행했다. 온정각으로 들어서는 노인들을 살피던 할머니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손을 들었다. 할머니는 다가온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잠깐 알은체를 하더니 이내 손을 뿌리쳤다. 이틀 내내 할머니는 말없이 먼 산만 바라봤다. 셋째 날 헤어지기 10분 전쯤 내가 ‘할머니를 안고 뽀뽀 해드리라’고 채근하자 할아버지는 용기를 내서 할머니를 껴안고 입술을 대려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팔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북측 가족은 탑승하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자 여기저기서 통곡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내미는 할아버지의 손마저 외면했다. 할아버지가 버스에 올라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할머니가 버스 쪽으로 달려갔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는 순간,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 기사가 야속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딸들과 사위들, 나도 엉엉 울고 말았다.”

-북한은 금강산에 있는 남측 기업들의 부동산을 몰수하거나 동결했다. 이 상태로는 관광 정상화가 어렵다고 본다.

“이산가족면회소를 갖춰 놓고 수년 동안 허송세월한 것이 너무 안타깝다. 지금쯤이면 이산가족들이 면회소에서 정례적으로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 순 없다. 다시 만나야 한다. 대화를 하다 보면 몰수도 해제되고 금강산 관광도 재개될 수 있다.”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에 대해 북한이 사과하고 재발방지책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북한 사람들은 우리를 참 답답하게 생각한다. 벌써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했는데 왜 그러느냐고 반문한다.”

-그게 말이 되는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방북했을 때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 문제를 언급했다고 한다. 북한 대남사업 담당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김 위원장이 말한 내용을 다시 남북 합의서에 명기하겠다는 보고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사고로는 이해가 안 될지 몰라도 현실이 그렇다. 그래서 남북 문제가 이렇게 힘들지 않나 싶다.”

-북한과 협상할 때 가장 필요한 자세랄까, 접근방법은.

“북한도 사람 사는 곳이다. 진심으로 대하고 상황에 따라 합리적으로 생각하되 모든 일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지나치게 과거에 얽매이면 미래가 없다. 특히 북한 측에 뭘 가르치겠다는 자세는 지양해야 한다. 민족통일이 가져다 줄 꿈과 비전을 생각하면서 비록 지금은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우리 후대가 과실을 수확할 것이란 소망을 갖고 대화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 사람들과 대화할 때 유의할 점은.

“금강산 치마바위에 ‘천출명장 김정일 장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천출(天出)은 ‘하늘에서 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남한 행사지원요원들과 북한 보장성원(행사지원요원)들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통일부 L선생이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L선생은 ‘우리 사전에 천출은 천한 출신(賤出)이라는 뜻인데, 치마바위에 왜 천출명장이라고 새겨 놓았느냐. 보는 사람에 따라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고 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농담이지만 북한에서는 대역무도(大逆無道)한 일일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북측은 ‘당사자를 데려오라’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우여곡절 끝에 남측 단장이 사과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반세기 이상 등을 지고 살아온 남북 사이에서는 상대방의 문화와 생활, 가치관 등을 이해하고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실감한 사건이었다. 무시하는 태도나 행동을 보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

-북한과 교류 사업을 하는 교회의 바람직한 역할은.

“남쪽에는 기독교인이 1000만명에 이르지만 북쪽은 1만2000명에 불과하다. 남쪽이 북쪽에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한다. 1972년까지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북이 지금은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교회 건물을 지어주는 것보다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지원해야 한다. ‘고난의 행군 시절에 한국 교회의 지원 덕분에 선교 효과가 있었다’는 북측 인사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자식 사랑은 이념과 체제를 뛰어넘는다고 하는데.

“북측 보장성원 K씨의 아들이 평양의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 K씨는 아들 자랑이 대단했다. 입학선물로 주려고 롱맨 사전(Longman Dictionary)을 사서 방북할 때 갖고 갔다. K씨에게 영영사전을 사왔다고 말했다. 북한을 떠나기 전날 늦은 시간에 K씨가 불쑥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탁자 위에 있는 영영사전만 만지작거렸다. ‘아하 이것 때문이었구나.’ 일찍 주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사전을 건넸더니 K씨가 웃으며 받았다. 평양 같은 큰 도시에 살면서 여유 있는 사람들은 자녀에게 개인 과외를 시킨다고 한다. 고통 받는 북한 주민의 실상을 감안할 때 양극화 현상은 우리보다 더욱 심한 듯했다. 하지만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우리와 똑같은 것 같다.”

-북한 젊은이들은 남한을 어떻게 보는지.

“남한을 방문한 북측 태권도 대표단 K군에게 자유대련을 하면 몇 명 정도 상대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K군은 ‘미군 네댓명은 때려눕힐 자신이 있습네다’라고 했다.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다. 남한에 대한 북한 젊은이들의 생각을 물었더니 K군은 ‘남조선을 하늘나라라고 생각하는 애들이 많습네다’라고 대답했다. ‘과연 우리나라가 하늘나라인가’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더니 K군은 의외라는 듯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남북의 남녀 관계를 비교한다면.

“아내 눈치가 보여 집안에서는 담배도 못 피우고, 월급을 관리하는 아내로부터 용돈을 더 타내려고 가끔 거짓말을 한다고 말하면 북측 사람들은 이해를 못한다. 그럴 리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방북했을 때 여러 번 느낀 점이지만 북에서는 아직도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강하고 여성들이 매우 순종적이다. 남남북녀가 결혼하면 잘살 것 같다.”

-남북 작가들이 백두산에 올랐을 때 남자끼리 키스했다고 하던데.

“정상에 오른 고은 선생님이 북측 작가동맹 부위원장 L선생에게 포옹을 하자고 제의했다. 한참 동안 껴안았다가 떨어지는가 싶었는데, 고은 선생님이 ‘이제 입을 맞추자’며 느닷없이 입술을 들이댔다. L선생은 키스를 그만두고 싶은지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는데 고은 선생님이 놔주질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여류 작가가 한마디 했다. ‘저건 강간 수준이야.’ 주변의 남북 작가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오랜 세월을 기다린 끝에 만났는데 그 감격을 포옹으로 다 표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부산 아시안게임 때 ‘연습탄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하던데.

“대한사격연맹이 북측 사격선수단에 연습탄 5만발을 주었다. 북측 선수단은 연습량을 줄여 4만발 이상을 남겼다. 이를 갖고 출국하려다 세관에 걸렸다. 북측은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고 통관시켜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에서 논의했지만 의견이 엇갈렸다. ‘선물한 연습탄이니 주자.’ ‘실탄으로 전용될 우려가 있다.’ ‘연습탄인데 실탄으로 전용되겠느냐.’ ‘연습탄이라도 무기와 관련된 것이어서 국민정서 상 맞지 않는다.’ 결국 압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북한 선수단 감독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눈물겨운 사연이 있는 새터민들도 많을 텐데.

“새터민 모두 드라마 주인공 같은 역경을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나의 한국행을 도우려고 두만강변으로 갔다가 경비병에게 들킨 J씨 사연이 생각난다. 격투 끝에 J씨는 두만강을 건넜지만 누나는 끌려갔다고 한다. 사선을 넘어 남한 땅을 밟은 J씨는 우울증세로 병원 신세까지 졌다. 그 후 J씨가 누나를 한국으로 데려오려는 희망과 노력 속에 열심히 살고 있다는 연락을 해왔다. 참으로 다행이다.”

-북으로 돌아가는 새터민도 있다. 원인과 대책은.

“한국사회에 정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정착 지원을 위한 정부의 제도적 뒷받침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다. 먹고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터민이 사람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 국민 모두가 새터민을 따뜻한 마음으로 포용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은퇴 후엔 무슨 일을 할 건지.

“노하우를 살려 대북사업을 하려고 한다.”

사진= 이동희 기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