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형 칼럼] 진심(眞心)
입력 2013-07-29 18:27
우리에게서 사라진 단어가 하나 있다. 진심(眞心). 진심이 보이지 않는다. 정치계는 말할 것도 없다. 진심의 말은 실종된 채 허언과 실언, 폭언만이 난무한다. 개인과 정파의 이해를 떠나 진심을 보여주는 정치인이 있다면 모두의 환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한국 정치 현실에서는 진심을 찾기가 가장 어려운 상황이다.
진심이란 단어가 사라진 곳은 정치판뿐만이 아니다. 교회와 우리의 믿음 영역에서도 진심은 실종됐다. 진심은 본질이다. 섞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면 너무나 많은 것들이 섞여있다. 복음이 혼잡케 됐다. 값싼 복음이 난무하고 있다. 믿음의 본질 대신 비본질적인 믿음이 본질인양 들어앉아 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심이 사라졌다. 그러다보니 종교성이 하나님의 임재를 대체해버렸다. 우리가 진심을 갖고 복음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진심과 접속할 수 있다. 복음이 혼잡케 되어 본질과 비본질이 섞이며 하나님의 진심을 찾지 못하게 됐다. 하나님의 진심을 발견하기 힘든 것, 이것이 가장 큰 한국교회의 위기다.
지금 성도들은 진심의 목회자, 본질의 목회자에 목말라 있다. 그들은 티모시 켈러나 데이비드 플랫, 폴 워셔 등 본질적 목회를 펼치는 목회자들에게 환호한다. 따라서 ‘진심 목회’, ‘본질 목회’야말로 이 불신앙 시대의 가장 효과적인 교회 성장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기도하는 한 분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이태형씨가 앞으로 평생 간직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진심, 진심입니다. 진심을 잊으면 안 됩니다.” 생각해 보았다. ‘나는 한 번이나 진심하였던가.’ 만일 내가 진심의 삶을 살았더라면 나의 영역(가정과 직장, 교회와 국가)에서 뭔가 역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솔직히 나는 ‘진심하지’ 못했다. 뭔가 섞여 있었다. 그래서 역사가 일어나지 못했다. 수많은 좋은 여건에도 불구하고 트랜스포메이션(변혁)의 동인을 제공하지 못했다. 인생은 도돌이표였다. 다들 그렇게 사는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 가끔씩 진심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뭔가 달랐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보는 듯 믿었던 모세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도돌이표 인생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상향하는 믿음의 여정을 보이고 있었다. 세상에는 무심하지만 하나님께는 열린 반응을 보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진심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세상적 판단으로는 너무나 어리석은 결정을 하곤 한다. 그런데 진심의 사람들을 통해 역사가 일어났다. 보수와 진보, 복음주의와 은사주의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심의 사람들은 자신의 환경과 처한 상황에서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는 촉매제가 됐다. 그들의 진심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듯했다. 그들이야말로 한국교회의 희망이었다.
역사적으로 한국교회는 진심의 교회였다. 그래서 늘 진심을 갈구했던 이 사회의 등불이 되었다. 그러다 지금 잠시 기진한 상태가 되었다, 다시 활력을 되찾는 방법은 단순하다. 잃어버린 진심을 회복하면 된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앞에 진심이란 단어가 놓여 있다. 눈을 감고 ‘진심’을 묵상해 보시라. ‘나는 한번이나 진심했던가. 무언가 섞이지 않았는가. 나는 정말 누구인가. 사람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 소장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