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입양인 대회] “처음엔 버려졌지만… 두번째 가족은 축복 되었죠”

입력 2013-07-29 01:56


통신 엔지니어로 자리잡은 美 입양 정순영씨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13세 소녀 앨리슨은 11세 여동생의 손을 꼭 잡고 1972년 미국 시카고 공항에 내렸다. 키가 큰 백인들이 걸어 다니는 낯선 공간이 처음엔 그들을 주눅 들게 했다. 하지만 공항에서 만난 새 부모는 환한 미소로 맞아줬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따뜻하게 안아준 그들에게 처음 ‘가족’을 느꼈다.

한국에서도 가족이 있었다. 앨리슨이 8세이던 해에 어머니와 이혼한 아버지는 세 자매의 손을 잡고 경기도 소사의 한 고아원에 데려갔다. 아버지는 ‘다시 오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고아원으로 가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왜 더 이상 아버지 손을 잡을 수 없는 건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다시 아버지를 만난 건 4년 뒤다. 아버지는 “막내만 데려가겠다”며 이들을 다시 외면했다. 새로 가정을 꾸려 새 출발을 한다는 거였다.

한국에서 살던 4년은 ‘고아’로 불렸다. 공부를 잘했던 앨리슨이 우등상을 받자 친구들은 “고아한테 무슨 상을 주냐”며 선생님에게 항의했다. 소풍 때도 ‘고아’이기 때문에 담임선생님이 비용을 대신 내줘야만 했다. 철저하게 고아였던 앨리슨은 꿈이 없었다.

그에게 ‘기회’를 준 건 입양이다. 미국에서 살 수 있고,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게 된 것도 좋은 일이지만 무엇보다 따뜻한 부모가 생겼다. 여러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는 고아원 생활에 익숙했던 앨리슨은 미국에 도착한 뒤 2주 동안 침대에서 혼자 자다 굴러 떨어져 깨기 일쑤였다. 깬 뒤에는 ‘꿈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다시 미소 지으며 잠을 청했다고 한다.

시카고에서 꼬박 하루를 운전해야 도착하는 그의 동네 이웃들은 앨리슨을 ‘입양아’나 ‘고아’가 아닌 앨리슨 그 자체로 바라봐줬다.

세계한인입양인대회 참석을 위해 서울에 온 앨리슨 뷰캐넌(한국명 정순영·54)씨는 26일 기자와 만나 “내가 자란 마을 주민들은 나와 여동생이 한국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도록 한국에 관한 책, 잡지, 기사를 모아서 가져다주곤 했다”면서 “아직도 친구들이 챙겨준 기사 중에 ‘한국의 세 자매 가수(‘김시스터즈’로 추측된다)가 미국에 공연하러 왔다’는 내용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유명한 엔지니어가 됐다. 통신업체 버라이즌을 거쳐 현재는 ‘프런티어 커뮤니케이션스’란 IT기업에서 랜(LAN)망 디자인을 하고 있다. 그의 역할이 없다면 장애가 생길 경우 시카고 일대 유선전화가 다 마비될 수도 있는 중책이다. 중요한 업무를 맡은 터라 한 달간 휴가를 내고 한국을 찾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는 “입양아란 사실 하나로 많은 사람과 하나 될 수 있는 기회”라며 “입양이 내게 많은 기회를 줬고 축복이었듯 다른 입양인들과도 추억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킴 홈(52) 세계입양인협회(IKAA) 고문은 “입양인대회 참가자 모두 직장에 장기간 휴가를 내고 자비로 한국에 왔다”며 “입양인들의 자원봉사로 치러지는 입양인을 위한, 입양인에 의한 모임”이라고 설명했다.

앨리슨은 한국의 입양특례법이 개정된 데 대해 “입양아들이 자신의 출생기록을 알게 되고 양부모 자격 심사를 강화한다는 건 바람직하지만, 미혼모들이 편견 없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전까진 법 때문에 아기들이 버려지는 안타까운 상황이 계속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글·사진=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