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소녀·한국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 “너를 후원하게 돼 참 자랑스럽구나”
입력 2013-07-28 18:31
2005년 1월 서울 성수동 윤영희(71) 할머니는 필리핀 세부의 소녀를 알게 됐다. 국제어린이양육기구 컴패션을 통해 1대 1 양육 후원 대상자로 연결된 당시 일곱 살의 클레어였다. 자신의 손녀와 나이가 똑같아 왠지 마음이 남달랐다. 앞서 2년간 후원했던 인도네시아 어린이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던 터여서 클레어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클레어는 요리사인 아버지, 생선을 파는 어머니와 함께 살며 이부자리 정돈과 가축 돌보기, 빨래하기, 동생 보기, 바느질과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일까지 하는 효녀였다.
윤 할머니는 매달 몇 만원씩 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편지를 같이 보냈다. 빈곤과 재해에 시달리면서도 꿈을 잃지 않는 클레어처럼 정성스레 예쁜 편지지를 골라 한 자 한 자 써내려가 갔다. 서울 하왕십리동 삼성교회(담임 정동석 목사)에 출석하는 윤 할머니는 “38세에 주님을 영접한 뒤 늘 그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며 “클레어를 처음부터 내 손녀처럼 생각했고 그래서 편지도 쓰게 됐다”고 말했다.
이듬해 가을 윤 할머니의 우체통에 필리핀에서 온 편지가 꽂혔다.
“안녕하세요. 저는 후원자님이 후원하시는 클레어예요. 편지를 받고 정말 기뻤어요.”
여덟 살이 된 클레어가 글씨를 배우고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윤 할머니와 클레어는 서로 자기네 말로 편지를 썼지만, 컴패션을 통해 영어로 번역된 뒤 다시 현지어로 옮겨져 두 나라를 오갔다. 컴패션을 통해 오가는 한국 할머니와 필리핀 소녀의 러브레터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어린이답게 생일과 성탄절에 받은 선물을 자랑하던 클레어의 편지는 해가 거듭 될수록 길어지고 내용도 깊어졌다.
“편지만이 할머니와 제가 서로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네요. 삶이 아름다운 것은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누가 말해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어려움을 겪을 때 저는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지만 하나님이 내어 주신 시험 문제라 생각하니 지금 저는 삶이란 과목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2009년 12월)
윤 할머니도 자신의 이야기를 클레어에게 털어놓았다.
“지난 9월 5일 큰 수술을 받았단다. 암이라는 병이 일찍 발견돼 수술을 받고 회복하고 있는 중이야.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을 당할지 한 치 앞도 모르고 사는 것이 인생이야.”(2012년 10월)
윤 할머니가 나이가 든 만큼 클레어도 자랐다. 어느 덧 사춘기 소녀가 된 클레어는 할머니를 위로하면서 자신의 다짐을 이야기할 만큼 성숙해졌다.
“할머니, 수술을 무사히 받으셨다니 기뻐요. 할머니가 빨기 낳으시길 바라며 매일 기도해요. 살다 보면 가끔 어려움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줘요… 얼마 전 사랑이란 것에 대해 배웠어요.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고 진지하지 않다면 어떤 관계도 갖지 말라는 내용이었어요. 올바른 사람이라는 확신이 드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겠지요?”(2013년 5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한국 할머니와 필리핀 소녀가 주고받은 편지는 어느 새 80통을 넘어섰다. 올해 15세가 된 클레어는 사진 속에서 키도 훌쩍 컸고, 얼굴도 무척 밝아졌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