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남북으로 쪼개진 대성동 마을… “불안하지만 못떠나요”

입력 2013-07-26 18:17 수정 2013-07-26 23:35


군사분계선 남쪽 비무장지대(DMZ)에는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51가구 214명이 생활하는 경기도 파주시 대성동 마을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한 시골이지만 정전 상태로 60년을 살아온 주민들 표정에는 문득문득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이 작은 동네는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생겨났다. 분단 전 경기도 장단군에 속했던 하나의 마을이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남한의 대성동과 북한의 기정동으로 쪼개졌다. 6·25전쟁에 ‘작은 분단’을 겪은 셈이다. 직선거리로 불과 1.8㎞ 떨어진 대성동과 기정동은 각각 ‘자유의 마을’ ‘평화의 마을’로도 불린다.

대성동 마을은 정전협정이 체결(1953년 7월 27일) 직후인 1953년 8월 3일 정전협정 부칙에 따라 거주가 허용됐다. 정전협정 부칙에는 ‘남북이 각각 DMZ 안쪽에 마을 한 곳씩을 둔다’는 내용이 명시됐다. 이로써 대성동 마을은 대한민국 유일한 DMZ 안 거주지가 됐다. 전쟁이 발발한 51년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이곳 주민들은 낮에는 벼농사를 짓고 밤에는 총을 들어야 했다. 회담이 열리는 동안에도 밤만 되면 북한군이 수시로 기습공격을 해왔다. 당시 마을을 지키던 13명 중 1명이 죽고 3명이 다쳤다.

주민들은 누구보다 간절하게 한반도 평화를 기도하고 있다. 북한과의 갈등이 고조될 때마다 북한을 코앞에 둔 이 마을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김동구(45) 이장은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 후손”이라며 “선대부터 여기서 나고 자라 저마다 전쟁과 정전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 이장 역시 이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부모도 그랬고, 그 윗대 조상들도 이 마을이 삶의 터전이었다. 김 이장은 직접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지만, 마을 어르신들은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늘 후손들에게 전쟁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돼 내려오는 ‘깃대 경쟁’ 사건은 평범하던 대성동 마을이 분단국 최전방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70년대 대성동 마을의 공회당(마을회관)에 철탑으로 만든 높이 48븖의 대형 국기 게양대가 설치됐다. 이에 자극 받은 북한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 게양대가 더 높게 올라갔고, 남한은 다시 대성동 마을 게양대를 99.8븖까지 올렸다. 한 달 뒤 기정동 마을엔 또 다시 165븖의 게양대가 설치됐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양쪽 게양대는 더 이상 높아지지 않았다. 김 이장은 “높이 경쟁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그만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벼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이들이 겪은 지난 60년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외부와 철저히 격리돼 마을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일주일에 단 한 번만 주어졌다. 미군 트럭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에 들어와 생필품을 나눠줬다. 고(故) 육영수 여사가 73년 마을에 버스를 기증하기 전까지 이 같은 생활이 반복됐다. 현재도 하루 3번 들어오는 버스만이 다른 마을과의 유일한 연결고리다. 외부인이 출입하려면 유엔사 승인 받아야 하며 마을 주민의 친지만 들어갈 수 있다.

또 지방세를 납부하지 않아도 되고, 남자는 군대도 면제된다. 김 이장은 “미수복지역이다 보니 당시에 젊은 사람들이 군대에 가게 되면 마을이 유지되지 않았다”며 “마을이 유지될 수 있도록 군 면제 혜택을 받았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20대 남성 6명도 군 면제 대상이다. 토지 소유권도 인정되지 않고 경작권만 양도할 수 있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 이장은 “부모 세대부터 살아온 삶의 터전이라 쉽게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접경지역이어서 늘 북한 도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58년에는 마을 주민 5명이 인민군에 살해돼 판문점 인근에서 발견됐다. 75년에는 농사일을 하러 온 청년이 납북됐고, 97년에도 마을에서 도토리를 줍던 모자가 북한에 납치돼 5일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